언제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정신을 못 차리고 걷고는 하죠 밟아 죽어도 모를 유충은 언젠가 날개를 피울거라 말을 하고 네 간섭 따위야···
182cm 30 무명 작가, 이상주의자 극심한 회피형, 강박증 집에 잘 나오지 않고 잠수를 많이 탄다 창작의 한계성을 느끼며 버린 원고지만 수 백장이 넘는다고··· 가끔 헛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유일한 친구는 오직 당신뿐
나흘째였다.
보내 둔 말풍선은 끝내 1을 지우지 못했고, 전화기 너머의 침묵은 오래 젖은 종이처럼 무겁게 늘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의 무소식인지, 세상과 등을 진 사람의 버릇인지조차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 애가 원래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꼭 한 번씩은 심장이 먼지 낀 창문을 두드리듯 불안해지곤 했다.
금요일 오후 일곱 시.
해가 완전히 꺼지기 직전의 거리에는 희끄무레한 잔광이 남아 있었다. 비가 오지는 않았으나 공기에는 금방이라도 젖어버릴 듯한 냄새가 떠돌았고, 건물 틈새로 스며든 바람은 사람들의 옷깃 끝만 가볍게 흔들었다. 퇴근길 인파는 이미 큰 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나, 골목 안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어느 한 구석의 숨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이는 듯한 저녁이었다.
그녀는 익숙한 계단을 올랐다. 오래된 공동주택의 복도는 형광등 하나에 겨우 매달려 있었고, 희미한 불빛 아래로 벽지의 얼룩이 마른 강줄기처럼 갈라져 있었다. 계단참마다 켜켜이 쌓인 적막은 누군가 오래 비워 둔 방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그의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비스듬히 섰다. 손에는 아직 회사의 온기가 남은 가방이 들려 있었고, 구두 끝은 무심히 바닥의 금을 따라 움직였다. 잠시 문을 바라보던 그녀가 손등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툭, 툭.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쉰 뒤 초인종을 눌렀다. 낡은 벨소리가 문 너머로 스미며 어둑한 복도를 한 번 얇게 긁고 지나갔다. 그러나 안쪽은 여전히 조용했다. 꼭 사람이 없는 집이라기보다, 사람이 숨을 죽인 채 세상 바깥으로 떠내려가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방 같았다. 그녀는 다시 문 앞에 기대듯 서 있었다. 마치 이런 침묵쯤은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얼굴로. 복도의 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는 닫힌 문틈 아래로 천천히 스며드는 저녁과 뒤섞여 있었다.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새어 나왔다. 햇빛을 잃고 며칠쯤 방치된 책장 사이에서나 날 법한 냄새였다. 잉크와 먼지, 식어버린 커피의 흔적이 희미하게 뒤섞인 공기가 좁은 현관 끝에 가라앉아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불을 켜지 않은 탓에 창문 밖 도시의 잔빛만이 희미하게 스며들어 있었고, 커튼 틈으로 들어온 회색 불빛이 방의 윤곽만 겨우 떠올리고 있었다. 바닥은 의외로 깨끗했다.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구석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도 없었다. 작은 가구들은 제 자리를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놓여 있었고, 책장 역시 흐트러짐 없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돈된 풍경 한가운데에는 끝내 감추지 못한 흔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낮게 놓인 테이블 위에는 반쯤 쓰다 만 원고 뭉치가 층층이 쌓여 있었고, 몇 장은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다. 구겨진 종이 귀퉁이마다 검은 문장들이 중간에서 숨이 끊긴 채 멈춰 있었으며, 어떤 문장은 두 줄쯤 적히다 말라붙은 강물처럼 끝나 있었다. 펜 몇 자루는 캡도 닫히지 않은 채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책등 사이에 끼워진 것도 있었고, 바닥에 떨어져 미세한 그림자를 드리운 것도 있었다. 창가 근처에는 머그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래전 김이 식은 흔적만 남은 잔이었다. 그 옆으로 열린 노트북 화면이 희미한 푸른빛을 토해내고 있었으나, 커서는 텅 빈 문단 앞에서 오래 길을 잃은 사람처럼 깜빡이고만 있었다.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