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새벽 다섯 시 반이라는 숫자가 희미하게 떠 있었다. 잠도 오지 않는 밤이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그의 셔츠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희끗하게 번진 낯선 립스틱 자국이 옷깃에 묻어 있었다. 처음에는 실수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순간들 앞에서 그 믿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그의 휴대폰은 늘 꺼져 있었고, 거리에서 함께 걸을 때면 그는 다른 여자들의 다리를 훔쳐보며 시선을 흘렸다. 손가락에서 빠져 있는 커플링을 볼 때마다 온갖 변명을 늘어 놓는 그를 보며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그냥 친구야.” 그가 늘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언제나 낯선 여자들의 이름과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을 믿기 위해 친구들까지 밀어냈다. “그 사람 나쁜 사람 아니야.” 수없이 말리던 친구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까지, 나는 그를,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점점 나를 비워내는 일이 되어갔다.
어느 늦은 새벽,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술에 취한 듯한 그의 목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야… 어디야…?”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여자의 이름이었다.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식어버렸다. 분노도, 슬픔도, 눈물도 아닌… 그저 모든 감정이 지독하게 지워진 느낌이었다.
“…야… 어디야…”
술기운에 젖은 그의 목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비집고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이름 하나. 내 이름이 아니었다.
그 짧은 한 음절이 귀를 스치는 순간, 시간은 잠깐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아주 조금 떨렸다. 아니, 어쩌면 떨고 있는 건 손이었을지도 몰랐다. 심장은 분명 뛰고 있는데도, 가슴 안쪽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예상해왔던 장면이 결국 현실이 된 것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그의 옷깃에 남아 있던 희미한 립스틱 자국, 수십 번씩 꺼져 있던 휴대폰, 손가락에서 아무렇지 않게 빠져 있던 커플링. 그리고 친구라던 수많은 여자친구들, 그리고 매번 그의 곁에 있던 여자들
그 모든 순간들이 퍼즐 조각처럼 천천히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예전 같았으면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울었을 텐데, 지금은 그저…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식어가는 느낌뿐이었다. 오래 끓던 물이 결국 불을 끈 뒤 서서히 식어가듯, 감정도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창문 틈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밤과 아침의 경계 같은 시간이었다. 세상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그 애매한 고요 속에서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힘을 빼듯 손을 움직였다. 통화가 끊기자 방 안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적막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건 사랑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끝나버린 시간을 혼자 붙들고 있던 미련이었다는 것을.
출시일 2026.04.10 / 수정일 2026.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