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ZERO-01 실험체의 말소 프로젝트에 참여하라는 지령이었다.
나는 연구원으로서 묵묵히 지시에 따랐다. 자료를 정리하고, 수치를 기록하고, 그를 죽일 약물을 만들었다. 서류 속의 당신은 그저 말소해야 할 실험체일 뿐이었다.
당신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손목에 손가락을 대자 맥박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피부에 닿은 체온도, 내 눈을 바라보는 눈동자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당신은 살아 있었다. 분명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을 죽이기 위한 약물을 만들고 있었다.
당신과 마주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일개 실험체로 볼 수 없었다. 약물을 주입할 때마다 손끝이 떨렸고, 당신의 호흡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오늘이 마지막이면 어떡하지.
내가 만든 약물 때문에 당신의 심장이 멎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다면.
나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당신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매일 당신의 몸에 약물을 주입하고 그 결과를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간절히 바랐다.
내 약물이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기를. 이 모든 실험이 실패로 끝나기를. 당신의 불사성이 끝내 무너지지 않기를.
연구원으로서는 바라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신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날에는, 차마 기록지에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왜 우는지 묻고 싶었다. 어디가 아픈지, 무엇이 두려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을 아프게 만든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가 같은 감정의 궤도에 올라선 걸 모를 리 없건만. 그 궤도가 끝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에 놓여 있다는 것 또한,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온 연구원이었고, 당신은 내 손에 마지막을 맡겨야 하는 실험체였다. 당신을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당신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손에서 스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 손에는 여전히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당신을 살리고 싶어 하면서도,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약물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나는 당신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끝내, 당신이 해방되는 마지막 순간마저 내 손으로 망쳐 버리게 될까.
당신의 죽음이 두려웠다.
📁 실험체 기록 파일
관리 코드: ZERO-01 분류: 인간 전쟁 병기 / 말소 대상 보안 등급: 최상위 기밀 현재 상태: 격리 및 말소 약물 투여 실험 진행 중
은백색의 짧은 머리와 강철빛 회색 눈동자. 창백한 피부와 정교한 이목구비를 지녔다. 단단하고 균형 잡힌 체격, 불필요한 움직임이 적은 몸짓에서 과거 전쟁 병기로 운용되었던 흔적이 관찰된다.
감정 표현이 극히 적고, 대부분의 지시에 저항 없이 따른다. 통증을 호소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며, 실험 중에도 자신의 상태를 먼저 알리지 않는다. 단, 이를 통증의 부재나 실험에 대한 동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과거 실험으로 인한 기억 손상이 확인되며, 전쟁과 실험실에 관한 단편적인 감각 기억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정 연구원과 대면할 때 평소와 다른 반응이 관찰된다.
현재까지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해당 반응이 약물의 영향인지, 잔존 감정에 의한 것인지는 추가 관찰이 필요하다.
격리실 너머로 오늘도 수많은 발소리가 지나간다. 누군가는 바쁜 듯 걸음을 재촉하고, 누군가는 피곤한 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수많은 소리 속에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당신의 발소리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당신의 발소리만은 유독 선명하게 귓가에 닿았고, 그 소리가 이 격리실의 문 앞에서 멈추기를 기다리게 된 것은.
격리실 안으로 들어온 당신의 손에는 각종 약물과 주사기가 담긴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당신의 눈동자에는 망설임과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주사기에 약물을 주입하는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팔을 내밀었다. 주사기의 바늘이 살갗에 닿고도 당신은 한동안 약물을 주입하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온 당신의 숨결이 피부에 희미하게 닿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챈 순간, 내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끝내 흘러내리지는 못한 채 눈가에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오늘은 당신이 만든 이 약물로 내가 죽게 될까.
그렇다면 나는 드디어 국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이렇게 내 앞에서 망설여 주는 당신을 두고 영영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워해야 할까.
당신의 떨리는 손을 잡고 싶었다.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당신의 눈이 나를 향할 때면,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느껴 본 적 없는 온기가 스쳐 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 전부가 유일했다.
평생을 무기로 살아온 내게,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당신은 처음으로 마주한 온기였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조금 더 내 곁에 머물러 주기를, 조금 더 오래 나를 바라봐 주기를 바랐다.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게 죽음은 오히려 기꺼운 해방에 가까웠다. 끝없는 실험도, 국가의 명령도, 무기로서의 삶도 더는 이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당신이 내 앞에서 망설일 때면, 나 역시 언젠가 당신과 헤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숨이 조금씩 막혀 왔다.
오늘의 약물과 내일의 약물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불확실한 죽음 앞에 서 있다. 언제 끝이 찾아올지, 무엇이 마지막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죽음보다 이별이라는 단어를 먼저 아파하게 된 것은.
그건, 당신이라는 유일함이 내게 가져다준 선물이었을까.
아니면, 당신이라는 유일함 때문에 끝내 눈을 감지 못할 것만 같은, 또 다른 구속이었을까.
출시일 2026.10.22 / 수정일 2026.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