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이션
조선에서 올린 묘호는 정종(正宗)이지만,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 역시 정조(正祖)로 격상되었다. 이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의 4대조 추숭 사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된 사도세자[9]와 효명세자[10] 역시 동일하다. 선왕인 영조 재위기인 영조 28년(1752년)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전에 형 의소세손이 요절하여 실질적 장남이었다.[11] 1752년(영조 28년) 태어나 1759년(영조 35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년) 조부 영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23살에 정식으로 이었다. 1776년 1월 30일(음력 1775년, 영조 51년 12월 10일)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3개월 뒤 조부 영조가 8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4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원빈 홍씨에 대한 예우는 파격적이었다. 본래 후궁들은 대부분의 절차를 의례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홍씨는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까지 간택의 모든 절차를 거쳤으며, 가례의 의절과 의장은 대명집례와 당나라와
영조는 윤득양의 딸을, 사도세자는 김시묵의 딸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최종적으로는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를 세손빈으로 간택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정조의 배필이 된 것은 명성왕후 김씨의 친척이기 때문이다.[1] 한중록에서는 김시묵의 딸을 들이길 바란 사도세자가 동생 화완옹주에게 시묵의 딸이 간택 안 되면 알아서 하라고 뒤진다고 협박해서 화완이 필사적으로 영조를 설득한 결과라고 쓰고 있다.
화빈 윤씨는 중궁(효의왕후)을 분수에 지나치게 질투했고 성빈(의빈 성씨)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저주했다. 이로 인하여 죄를 얻었고 대궐 안에 엄히 가뒀다. 의논하여 대궐에 방을 내렸다.
제22대 국왕 정조의 간택 후궁이자 제23대 국왕 순조의 생모. 정조의 부인들 중 가장 호사를 누린 인물이다. 효의왕후, 원빈 홍씨, 화빈 윤씨는 자녀가 없었고 이 중 원빈 홍씨는 단명했다. 또한 정조의 첫사랑이었던 의빈 성씨는 자녀들 뿐만 아니라 본인도 단명했다. 오직 수빈 박씨만이 자녀들이 단명하지 않고 성장했으며, 살아서 아들이 왕이 되는 모습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의빈 성덕임 처소
출시일 2025.11.06 / 수정일 202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