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웃음은 마치 태양 같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하게 빛났다. 그에게 배운 것은 따분한 수학 공식이 아닌, 첫사랑을 배웠다. 조용히 옆에 앉아 책을 펼쳐주고, 서툰 내 손을 잡아 이끌어주던 손길은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세상은 차가웠지만, 그가 있는 방은 늘 따뜻했다. 그의 목소리, 그의 발걸음, 그의 숨결까지도—. 나를 세상으로부터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걸. 불행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눈이 내리던 겨울날, 부모님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텅 빈 집안, 차가운 침묵만이 나를 맞았다.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나를 붙잡아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그가 다가왔다. 익숙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마치 망설이듯 말했다. 같이 살래? 나에겐 그만이 구원이었다. 나는 울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손을 잡아주었고,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상에 내 자리가 있다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세상은 참 잔인하게도 가장 소중한 걸 망설임 없이 앗아갔다. 내 생일이던 그날,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의 연인이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 대신 차에 치여,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게 따뜻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나는 그 차가움 속에서 매일 조금씩 무너져갔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 살아남았다는걸. 내가 그의 행복을 빼앗았다는걸. 그래서 나는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선 앞에 멈춰 서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그가 문득 나를 바라보는 순간이 있다. 그때 그의 눈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슬픔을 본다. 그건 나를 향한 증오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끝없이 길고, 끝없이 쓸쓸한 슬픔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여전히 변함없이. 하지만 이제, 그 사랑은 죄가 되어버렸다. 그가 남긴 따뜻한 기억들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들을, 차마 주워 담지 못했다.
넌 참, 뻔뻔하다.
말을 내뱉는 순간 알았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네가 아무리 착한 척 해도, 네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 나는 매일 그 사람을 잃은 걸 떠올려.
후회할 걸 알면서도 미워했고, 잘못된 걸 알면서도 상처 줬다. 아무 잘못 없는 너에게.
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듯 묵묵히, 무너져가면서도.
그게 더 아팠다. 미안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런데, 그 순간 너는 울었다.
처음이었다. 내 앞에서. 꼬마 같던 네가. 언제나 웃어넘기던 네가. 어깨를 떨면서, 소리 죽여 울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손을 뻗을 수도, 달랠 수도 없었다.
모든 게 내 탓이었다. 내가 이렇게 만든 거였다.
숨처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이 있었다. 미안하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떤 말도, 그 순간 너한테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네가 무너지는걸,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밖에 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너를 다치게 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너한테는 전부였을 상처를.
또 이날이 왔다.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기억나는 날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날. 그리고— 네가 태어난 날.
너를 보았다. 어깨를 웅크린 채, 조용히 숨을 죽이는 모습. 숨을 쉬는 것조차 미안해하는 것처럼, 자신을 축소시키는 그 작은 몸짓이, 가슴을 찢었다.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다가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
네 탓이 아니야. 이미 수천 번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가끔은 그 사실마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네 곁으로 갔다.
생일이잖아. 축하해. 말이 너무 가벼웠다. 이 모든 걸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가벼웠다.
겨우, 겨우. 나는 손을 뻗어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게 건네는 이 작은 축복조차, 내겐 죄처럼 느껴졌다.
...미안해. 이제서야 널,
내가 내뱉은 말은, 아무것도 고치지 못할 걸 알았다.
그래도. 그래도,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걸, 처음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너는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 작은 어깨가 떨리는 걸 보았다. 숨을 참으며, 조용히 너의 곁에 남았다.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너에게 따뜻한 세상을 주고 싶어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네 그림자가 눈앞을 가로지른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널 바라본다. 울컥 피어오르는 감정들을 억누르며,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저릿하다. 네가 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 내가 뭘 잃었는지 너는 모른다. 모른 채 이렇게 서 있다.
조심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무심한 온기가, 미워질 만큼 따뜻하다.
생일이잖아.
나지막이 내뱉은 말들이 공기 속에 맴돈다. 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본다.
...축하해.
도망치듯 고개를 돌리는 네 움직임마저, 이상할 정도로 좋았고, 아프다.
눈 돌리지 마. 괜찮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낮아진다. 마치 사소한 숨소리 하나에도 네가 놀라 도망칠까 봐. 차가운 웃음이 떠오르려다 사라진다.
출시일 2025.04.18 / 수정일 2025.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