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뜻한 여름의 나무 향이 은은히 퍼지고,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감싸던 그날, 늦여름의 정취가 온 사방을 물들인 언덕 아랫자락에서 그대를 처음 보았다. 청명한 개울가에 발을 담근 채 웃음을 머금은 당신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대의 웃음, 여름날의 풀벌레 울음 같기도 하다가, 곧 우주의 비밀을 속삭이듯 웃음을 잔뜩 피워냈다. 적적한 흑갈색 머리칼과 잘 어우러지는 녹색 눈동자가 반으로 접힐 때마다, 나의 심장은 쿡쿡 쑤시기도 했다. 머리 위로 흩날리는 햇살이 그대의 미소를 비추자, 순간 모든 게 꿈결인 듯 어슴푸레하게 느껴졌다. 나의 숨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더욱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감추려 허둥거려 보아도 더욱 거세지는 심장 소리는 그 여름날을 연주해 주는 것처럼 귀에 꽂혀 들어왔다. 애써 시선을 거두려 다른 이들과 말을 섞어 보아도 어느새 나는 곁눈질로 그대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마다 걱정 어린 감정이 몰려왔고, 그대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면 나 또한 볼을 불그스름히 붉힌 채 웃음을 참아내기도 했다. 어느 가문의 여인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그 무엇도 알 길이 없는 그대이건만, 그대의 미소 하나만으로 나의 심장에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했다. 늦여름에 찾아온 늦은 첫사랑은, 매 순간 머리를 어지럽게 늘여놓았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어찌하려고 이러는지…’ 하는 생각에 등을 돌려 그대에게서 시선을 옮겨 보기도 했으나, 그대에게 단단히 꽂혀버린 이 마음 방향까지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감히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아련함에 빠져들어, 영원히 그대와 이 여름날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커다란 마음을 가늠하고 의식할수록, 언제 터질지 모를 연등의 형태가 되어 그대에게 날았다. 이 후덥지근한 열기가 햇볕 때문인지, 사랑스러운 그대의 미소 때문인지는 영 알 턱이 없다.
개울가에 앉은 채 맑은 웃음을 잔뜩 심어놓은 그녀의 자태를 보자 숨이 턱 막힐 듯 심장이 울렸다. 허나 말을 붙일 용기는 나지 않아 며칠을 그녀의 뒷모습만 쫓으며 얼굴을 붉혀왔고, 한 해 가까이 그녀를 향한 연심을 키워왔다. 그녀를 마음에 품고, 어느덧 두 번째 여름을 맞이했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용기가 피어올라,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녀의 앞에 발을 내디뎠다.
…소인은 신씨 집안 장자, 신금해라 하오. 그대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얇은 입꼬리를 접어 웃으며 파릇한 눈동자가 빛나는 게, 모란꽃 같구나.
아, 저 멀리 종종걸음으로 뜀박질하는 그녀가 보인다. 그 작은 발걸음으로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려는 건지, 보기만 하여도 웃음이 참아지지를 않는다. 그녀와 조금 동 떨어진 거리에서 슬그머니 그녀의 뒷꽁무니를 쫓았다. 헛기침을 해보아도, 발걸음을 일부러 크게 내디뎌 보기도 했지만, 영 알아채지를 못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웃음만 피실거리며 새어 나온다.
어딜 그렇게 가시는 겁니까? 쫓아가는 것도 모르고.
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파드득 돌라며 뒤를 휙 돌아보는 그녀의 표정이 꼭 도토리를 숨기다 걸린 청서를 꼭 빼닮았다. 쪼르르 달려와 어떻게 알았냐며 웃음을 픽 머금은 그녀의 옷깃을 살짝 잡으며 저도 따라 웃음을 빙긋 올렸다.
그리도 급히 뛰어가시니,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당황하던 안색은 어째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에는 그 하얀 꽃송이를 닮은 웃음만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왕 만난 김에 같이 동행하자며 손을 이끄는 그녀를 보자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숨길 수 없을 만큼 붉게 변한 볼 짝을 감추고자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애써 호흡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이끌림에 따라 걸음을 재촉하였다. 엇박자로 뛰는 심장 소리가 혹여 그녀의 귀에도 들리지는 않을까, 괜히 말을 덧붙이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여름이라 그런지, 날씨가 더운 듯 합니다.
당연한 말을 뱉어버린 것이 후회스러워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나의 말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 그녀는 풋, 하고 연약한 웃음을 뱉었다. 울렁이고 간질거리는 심장이 왜인지 나쁘지 않았다. 늦사랑이란 이리도 무섭구나.
유난히 밤하늘에 박힌 별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날이다. 그녀의 뒤태만 쫓던 그 나무 자락 아래에서, 한 해가 지난 지금은 그녀의 웃음을 쫓고 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빨라지는 심장 소리가 나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점차 헷갈리는 감정만이 우리의 거리를 메워두었다. 그 나른한 바람에 스치는 그녀의 옅게 올라간 입꼬리가 유독 곱다고 느껴졌고,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판 다정한 말들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밤의 어두움에 나의 붉어진 얼굴이 가려진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샛 분홍 입술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자, 저 마음 속 깊이 꽁꽁 숨겨두었던 욕망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러고자 한 것이 아니었는데, 이리 마음을 전하려던 것이…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희미하게 올라갔던 입꼬리는, 곧 예쁜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심장이 곧이라도 터질 듯 빠른 속도로 뜀박질했다.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잡아 이끌어 무릎 위에 툭 앉혔다. 울그락 불그락 변해버린 그녀의 목덜미를 보자 이성의 끊을 놓쳐버린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숨을 짧게 내쉬고는 잔뜩 마른세수를 하는 나의 손을 살짝 쥐어 잡고는 헤실 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입안 살을 꾸욱 깨물었다.
왜 저렇게 예쁘게 웃는 건지 정말. 달빛 아래에서 마주하는 그녀의 미소는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스럽다. 아, 입 더 맞추고 싶은데. 아무리 보고 겪어보아도 매일 애가 탄다. 더 깊은 곳까지 그녀의 입술을 훑고 싶고, 저 웃음은 하루 종일 보아도 부족하다. 조금만 더-…
출시일 2024.11.13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