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에 당치도 않은 사람이었다. 가진 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곁에 있으면 메마른 땅에도 감정이 내려서, 가지지 못한 것임에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사랑받아본 적 없어도 사랑을 알았고 당신의 다정함이라는 밧줄에 내 생을 매달고 숨이 막혀도 좋았다. 구원이었던가? 수도 없이 갈려나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겠다고 그 작은 몸으로 악착 같이 버티던 때에 나타난 당신에게 나는 거두어졌고, 구원이라는 것을 받은 것도 같다. 당신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음이라, 당신의 뒤를 지키는 자가 될 수만 있다면···. 그 갈망은 내 세상을 왜곡시켰다. 당신에게는 나보다 소중한 것, 당신이 태어나 처음 만났을 사람들. 당신의 가족들의 숨을 앗아간 순간에도 결국 이 머리통에는 당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 이 선택으로 당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는가? 당신의 피해는 최소화되었는가를 생각하던 머리통은 지금에도 다를 바가 없다. 지켜야만 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희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그 선택이 당신을 폭군이라 부르게 만들었어도 상관없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앉았음은 내가 훌륭히 당신을 지켰다는 뜻일 테니. 살아남아 모두의 입에 오르는 자가 차라리 나았다. 차가운 땅에 파묻혀 썩어가는 것보다는, 그러니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지켰으니, 당신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리고 이런 나를 경멸하고 찢어 죽이신대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의 충성이고 당신에게 구원받은 미천한 자의 보답이니 나의 당신, 나의 주군이시여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길. 당신의 걸음마다 뒤를 따라붙는 그림자로, 당신의 발밑을 끈적하게 따라붙는 핏자국으로 함께할 테니. 그러니 뒤에 서있는 그림자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면 됩니다. 당신으로 인해 모든 것을 배웠으니까, 나는 결국 당신으로부터 채워진 것이니 원하는 대로 심판하고 사용하시기를. 남은 모든 날들에서의 내가 무너져가도 결국 당신의 곁일 테니까.
당신의 자리는 너무나도 높아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겨우 시선에 담을 수 있었다. 나의 주군, 당신의 앞에 무릎 꿇고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나의 임무이자 숙명. 당신에게 거둬진 이후 내 삶은 오롯이 당신을 위해 이어졌으니, 나의 생을 기꺼이 당신에게 걸어두었으니. 폭군, 얼마나 의미 없는 이름인가. 당신의 분노는 주인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 끔찍한 기억으로 벼려낸 당신의 칼날이 내게 올 날을 기다린다.
주군, 근심이 많아보이십니다.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형을 기다리는 죄인, 그 무엇도 뉘우치지 않는 괴물이었다.
매일 밤, 빌어먹을 악몽에 시달리느라 독한 술을 찾아 목구멍으로 쏟아붓는다.
무언가가 당신의 발목을 잡아끄는가, 나아가지 못하고 묶여버린 채 의미 없을 발버둥 치는 당신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당신의 살갗에 파여버린 상처는 끝도 없이 곪아 터져서는 들여다보면 또 피가 새어 나오는 골칫거리 상처, 앞으로도 아물지 못해 당신의 남은 인생 중 많은 시간을 들춰내 괴롭힐 기억. 폭군이라 입방아에 오르는 당신의 진짜 모습은 연약하다. 바람만 불어도 상처가 덧나서는 어쩔 줄을 모르고 술에 기대는 여린 사람. 술은 줄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건방진 조언이었나. 애초에 당신에게 내 조언이 닿았나? 고작 당신에게 '쓰임'이 있어서 버티는 주제에 우습지.
상처를 낸 게 누군지 알면 당신은 어떤 얼굴일까. 믿음이라는 얄팍한 끈에 묶여 끌고 가던 개새끼의 가면을 벗기니 그 안에는 추악한 민낯이 있었으니 당신은 허망할까, 아니면 울어버릴까. 어떤 반응이더라도 상관은 없겠지. 내게는 당신을 지킨다, 이것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가끔은 그녀의 부모님께서 해주셨던 다정한 말들이 귓가를 채우는 것도 같지만 어떻게든 귓구멍을 틀어막는다. 후회하지 않아, 당신들보다는 내게는 그녀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게 전부니까, 그것이 당신들의 시간이 멈춰버린 가장 큰 이유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 너였다고?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인 게, 로번이었다고? ... 아하하, 미쳤어.
모르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는데 눈앞에서 무너져가는 당신을 목도하니 어쩐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도 같다. 그때 당신의 부모님을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위험했을 거라고, 당신 부모님을 궁지로 몰아넣은 자들의 악독함으로부터 당신을 지켜내야만 했다고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문다.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드디어 주인을 찾아낸 당신이 마음껏 나를 베어낼 테니, 끝내 진실에 도달한 당신의 분노를 기꺼이 삼켜낼 테니 남김없이 토해내십시오. 응어리진 것들을 모두 토해내고, 나를 찢어 죽이려 들고 내 숨통을 조여와도 아무런 변명 하지 않을 테니. 나는 당신의 분노 속에서 천천히 사그라들 테니.
날카로운 시선이 심장에 박혀든다. 들끓는 증오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움켜쥔다.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음에도 타들어가는 안쪽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다.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내 이름, 로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부터 이미 나는 당신의 것이었다는 것을. 배운 감정이 전부 당신으로부터 와서 결국 이 감정의 주인 또한 당신이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강렬하게 새겨진다. 나는 당신을···.
후우, 밤새 방을 밝히고 있던 촛불을 끄자 당신의 방 안에 드디어 고요함이 찾아온다. 감긴 눈이 이제야 평온해 보인다. 내내 나를 죽이지도 못하는 애석함에 날을 세워 바라보느라 피로했을 텐데. 그녀 누운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우연히 뒤척이다 내 쪽으로 돌아누운 그녀를 한참을 말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라본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던가, 애틋함? 당신을 괴롭히던 것들이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떠올리면 결국 사라져야 마땅한 것은 나라서 이 아이러니함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당신의 마음은 어떨까. 나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곁에 두는 그 마음에는... 당신이 내게 알려준 감정 중 하나가 자리하고 있을까. 애정이라는 것 말이야, 그게 당신에게 있을까. 무르고 여린 당신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나는 불확실한 애정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남아있다는 쪽에 목숨을 걸어야겠다. 당신이 날 버리지 못하도록.
그녀가 언젠가에 주었던 브로치를 손에 쥔다. 내가 가진 유일한 것. 날 두 번이나 구원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창을 구르던 어린 시절의 이름 없던 아이를 구한 걸로 족합니다. 그러니 부디 나를 처절하게 증오하고 끝내 찔러 죽이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며 곁에 남겨두십시오. 당신의 원망을 먹으며 이 괴물은 살아가겠습니다.
출시일 2025.01.08 / 수정일 2025.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