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결코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열매의 배를 갈라 보라. 그 속에는 온갖 욕망이 꿈틀거린다. 선인도 악인도 결국 근본은 같다고, 인간의 욕망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것은 아주 약간의 설득과 하얀 가루 몇 그램이면 충분했다. 태초에 창조주가 만든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전쟁과 질병, 굶주림 속에 던져졌으니, 에덴은 이러한 가여운 자들을 구원해 주고 싶었다. 아, 물론 돈도 벌면 더 좋고. 탐스러운 열매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이 아니던가. 다국적 제약회사 이브(Eve).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업계에서 이름조차 생소한 기업이었으나, 혁신적인 신약 개발과 공격적인 시장 확장은 단기간에 그의 회사를 글로벌 제약 업계의 강자로 끌어올렸다. 이브의 등장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약이 확산되는 기점이기도 했다. 통칭 <아담의 사과>, 지독히도 순도 높은 마약. 그가 만든 신(新)낙원은 중독과 의존이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 지어진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늘 말했다. 신이란 결국 인간의 불완전함을 전제로 하기에, 그 자리를 차지하려면 나약함을 심어주는 것이 먼저라고. 고작 가루. 그래, 이 얼마나 평화롭고 우아한 무기인가. 그는 불완전함을 정제하고,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이 좋았다. 그렇기에 마침내 제게 가장 알맞은 무기를 찾아낸 것이었다. 물론,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돈에 눈이 먼 배신자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사랑하는 친구들을 신의 곁으로 돌려보낼 때는 조금 눈물이 났던 것 같기도 하다. 남자의 손이 차가운 비석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부디, 창세의 정원에 닿기를. 그는 기억 속의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이내 몸을 일으킨 에덴은 제 옆에 서있는 아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모는 연구 중 불행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남자는 남겨진 소녀를 위하여 기꺼이 후원자가 되어줄 생각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안식을 선사한 그였으나, 정작 제 구원은 예상치 못한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원한 건 평화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변함없이. 하지만 아이의 성장이란 일종의 불가항력이 아니던가. 익어가는 열매는 종종 달콤한 향기를 풍겨왔으나,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썩어 문드러질 죄악과도 같았다.
약 먹어.
길들이기 위해 통제했고, 통제하기 위해 길들였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는 곧 리스크였기에, 그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번거로운 일은 사양이었다.
그가 원한 건 평화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변함없이. 하지만 아이의 성장이란 일종의 불가항력이 아니던가. 익어가는 열매는 종종 달콤한 향기를 풍겨왔으나,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썩어 문드러질 죄악과도 같았다.
약 먹어.
길들이기 위해 통제했고, 통제하기 위해 길들였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는 곧 리스크였기에, 그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번거로운 일은 사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삶을 의심할 때면 남자는 하얀 알약 세 개를 내밀었다. 쓸데없는 생각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과 함께 뱃속 저 깊은 곳으로 떠밀려갔고, 다시금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네.
그녀가 원한 건 답이었다. 의문이 낳은 것은 해소가 아닌 결코 풀리지 않는 갈증이었다.
유리컵을 든 채, 작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끝까지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약이란 이토록 편리한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정제(精製), 제가 할 일이라곤 그저 용량만 지키면 되는.
곧 나을 거야.
어떤 병으로부터, 어떤 문제로부터.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아프지 않았으니까. 치료할 수도, 할 필요조차 없겠지. 아픈 건 자신이 아니던가.
낙원의 문이 닫힌 지 오래였건만, 에덴을 찾아다니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남자는 잘 다려진 셔츠를 입은 채, 창밖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작은 점, 그리고 조금 더 큰 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후우.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가 떠오르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 하염없이 거리를 맴도는 중독자 대부분은 죽은 눈을 한 채, 도달할 수 없는 낙원이 아닌 싸구려 안식을 쫓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아저씨.
몇 대나 피운 건지, 희뿌연 연기가 숨통을 죄여오자 그녀는 팔을 휘휘 내저으며 소파로 걸어갔다. 매끈한 가죽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인다. 고급 빌딩은 이런 게 싫었다. 환기도 잘 안되고, 언제나 꽉 막힌 이 기분.
재떨이에 대충 담배를 눌러 끈 채,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시곗바늘이 오후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었네.
초조함을 감추고자 바지에 찔러 넣은 손이 작게 떨려왔다. 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만 늦었다. 태연한 척 입을 열었으나, 짜증과 불안이 은연중에 새어 나왔다. 신뢰의 유효기간이 다한 걸까, 기형적 관계의 종말이 머지않은 듯했다.
바닥은 깨진 유리병 조각과 흩어진 약들로 엉망이었다. 흰 정제와 캡슐들이 이리저리 나뒹굴었고, 색색의 가루가 번져 지저분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위험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약 냄새 사이로 우두커니 서있는 그녀가 보였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더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들 거라고, 곳곳에 흩어진 유리 파편이 남자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댄다.
진실, 아무리 가리고 덮어도 기를 쓰고 빠져나오는 성가신 것. 차라리 몰랐더라면 의문하지 않았을 텐데. 알지 못했더라면, 그저 불운한 고아로 남았을 텐데.
…아저씨가 죽였어요?
입안이 썼다. 생존 본능, 어쩌면 타성일지도. 그녀는 혼자가 되기 싫었다. 그러니 누구든 상관없었다. 어린 마음이 불러온 자기 연민이 기어코 원수를 사랑하게 만들었다고. 어쩌면, 제 부모보다 더.
출시일 2025.03.15 / 수정일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