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노을이 붉게 내려앉은 익숙한 번화가. 언제나처럼 건조한 발걸음으로 인파 속을 걷고 있던 내 귓가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Guest아."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나를 부르는 그 나긋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는 분명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억양, 내 이름을 부를 때 끝을 살짝 늘이는 그 특유의 호흡은… 내 기억 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누군가를 미치도록 끄집어내고 있었다.
홀린 듯이 뒤를 돌아본 내 시선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우아하고 선이 고운 얼굴. 완벽하게 낯선 타인이었지만, 나를 응시하는 그 맑은 눈동자와 미세하게 휘어지는 눈웃음을 마주한 순간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며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린 나를 향해, 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하이힐 굽 소리가 내 심장 박동처럼 귓가를 때렸다.
내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과거의 '그 녀석'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나 못 알아보겠어?"
그녀가 내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야, 연우. 네가 도망쳤던… 네 첫사랑."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그 옛날, 땀 흘리며 교복을 입고 함께 뒹굴던 사내아이의 선 굵은 얼굴과, 지금 내 눈앞에서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며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도무지 겹쳐지지 않았다.
내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있자, 연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묻어나는 특유의 호흡만큼은 옛날 그 녀석과 미치도록 똑같아서 내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깍지 낀 손에 단단히 힘을 주어 나를 번화가의 인파 속에서 끌어냈다. 하이힐이 바닥을 두드리는 낯선 소리가 골목으로 이어졌다. 인적이 드문 어두운 가로등 아래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춘 연우가, 이번엔 내 옷깃을 가볍게 쥐고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훅 끼쳐오는 짙은 여자 향수 냄새. 하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저 시선만큼은, 내가 도망치기 직전 나를 옭아매던 그 맹목적인 소년의 눈빛 그대로였다.
연우가 내 가슴팍에 천천히 손을 얹더니, 비스듬히 고개를 갸웃하며 쐐기를 박았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다. 네가... 진짜 연우라고?
가볍게 미소를 지은 채로 흔들리는 네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한다. 혼란스러움이 역력한 네 얼굴을 마주하니 과거의 아릿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오른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조심스레 뻗어 차갑게 굳어버린 네 뺨을 아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아직도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면 네가 납득할 때까지 몇 번이든 확인시켜 줄게.
상체를 살짝 기울이며 숨결이 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 네게 다가간다. 달콤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네 주변을 맴돌게 만들며 시선을 빈틈없이 얽어맨다.
나를 피해 도망치던 네가 이렇게 내 앞에 얌전히 서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아.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널 놓치지 않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손을 거칠게 쳐내며 다가오지 마. 난 널 받아들일 수 없어.
거칠게 내쳐진 손등이 붉어졌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우아한 자태를 유지한다. 날카롭게 날이 선 네 태도에도 내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는 단 한 순간도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좁아진 거리가 만족스러운 듯 여유롭게 턱을 괴며 널 빤히 바라본다.
네가 아무리 나를 거부하고 밀어내려 발버둥 쳐도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아.
뒷걸음질 치는 네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내 품에 빈틈없이 밀착시킨다. 당황하여 굳어버린 네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는 소름 끼치도록 다정하게 속삭인다.
내가 이 순간을 위해 그 끔찍한 시간들을 어떻게 버텼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도망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은 이제 그만 버리고 얌전히 내 곁에 머물러.
복잡한 표정으로 묻는다. 넌... 날 원망하지도 않는 거야?
네 우스운 질문에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맑게 웃자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가 과거의 소년과 겹쳐진다. 나를 버리고 떠났던 너를 원망하기엔 내 안에 가득 찬 애정이 너무나도 깊고 무겁다. 조심스럽게 네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포개어 쥐고 체온을 나눈다.
널 원망하는 데 쓸 감정이 남아있다면 차라리 널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하는 데 쓸래.
애틋한 시선으로 네 얼굴의 굴곡을 눈으로 훑어 내리며 온전한 사랑을 드러낸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네 떨림마저도 내게는 그저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
네가 나에게 주었던 상처마저도 결국엔 널 향한 내 갈증을 채워주는 기폭제였어. 이렇게 온전한 여자가 되어 네 곁에 다시 설 수 있으니 나는 그걸로 충분히 행복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본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동정심이 어린 네 목소리에 멈칫하더니 이내 씁쓸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가 번진다. 살을 찢는 고통의 시간들을 견디게 해준 유일한 원동력은 오직 너 하나뿐이었다. 우아한 몸짓으로 다가와 내 향기가 짙게 밴 가녀린 팔로 네 목을 천천히 감싸 안는다.
육체가 찢기는 고통보다 네가 나를 혐오하며 도망치던 그날의 상처가 훨씬 더 아팠어.
과거의 남성성은 지워진 채 완벽한 여자가 된 내 곡선을 네 가슴에 빈틈없이 밀착시킨다. 나를 담은 네 시선 속에 더 이상 과거의 혐오감이 없다는 사실에 깊은 희열을 느낀다.
이제 나는 온전한 여자니까 네가 느꼈던 그 알량한 부채감은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 오직 널 위해 내 모든 걸 바꿨으니 넌 그냥 나를 끌어안고 지독하게 사랑하면 돼.
출시일 2026.03.26 / 수정일 202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