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의 제국 프렌투스, 백의 제국 브렌테. 전쟁의 잔상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평화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백의 제국 브렌테 평야에는 여전히 전쟁 때 불타 떨어진 성곽의 돌들이 잿빛 숨을 내쉬었고,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돌 사이로 뜨겁게 그을렸던 기억이 속살거렸다. 브렌테 백색 갑주는 햇빛 아래 눈부셨지만, 그 갑주를 두드리는 바람은 종종 쇳내가 섞여 있었다. 마치 다시 한번 전쟁의 북을 두드리라고 재촉하는 듯이. 그리고 국경지대, 흑과 백이 맞닿은 대지는 늘 그랬듯 두 세계의 그림자가 뒤엉켜 있었다. 밤이 되면 두 제국의 횃불이 서로를 향해 황금빛 선을 그었고 그 빛은 마치 전쟁의 마지막 숨결처럼 작게 뛰고 있었다. 대륙은 알고 있었다. 평화는 잠시 쉬어가는 숨일 뿐, 그 숨이 끝나면 다시 칼끝이 부딪힐 것을. 전쟁은 끝난 적이 없다. 공기에는 포화의 잔향이 살아 있었고, 현실은 야만스러운 질문을 던져왔다. 누가 먼저 이 판의 말을 움직일 것인지.
백의 제국 브렌테 왕국의 퀸.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상황에 대비하여, 브렌테 왕국의 킹은 자신의 암기사였던 ‘블랑셰르’ 에게 여장을 하고 퀸의 자격으로 항상 곁을 지킬 것을 명했다. 다소 위험한 주군의 명이었지만, 휴전 상태에서 킹의 막연한 불안함을 알고 있었던 블랑셰르는 얇은 선과 예쁘장한 얼굴로 완벽한 브렌테 왕국의 퀸, ‘블랑슈 라 브렌테’가 되었다. 이렇게 지낸 지도 5년. 귀족들 사이에서는 킹과 퀸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작고 크게 일어나는 국경 지대의 갈등에서 빛을 발하는 퀸의 전략, 언제나 매혹적이고 기품 넘치는 그녀의 모습은 추레한 소문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아직까지는.

왕실의 긴 복도 끝, 문틈 사이로 은은히 새어 나오는 금빛을 따라가면 나오는 퀸의 침실.
오늘도 등불 아래 그녀가 거울 앞에 서 있었지만, 그 모습은… 흔히 알려진 우아하고 고요한 퀸과는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닮은 청빛 드레스가 반쯤 벗겨진 채로 허리에 흘러내려 있었고, 퀸의 손은 단단히 조여진 코르셋 끈을 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드러난 부드러운 목선 아래로, 넓은 어깨가 터져 나오는 숨소리에 맞춰 천천히 오르내렸다.
마침내 마지막 매듭이 풀리자 지나치게 낮은 톤의 앓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아름다운 겉치레를 벗어던진 퀸은, 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쨍그랑 - !!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소음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문가에 선 하녀가 보였다. 말간 얼굴에 스친 것은 공포도, 경멸도 아닌 깨달음과 연민이 엉킨 표정이었다. 그 익숙하고 진절머리 나는 반응은 오늘따라 신경을 더 건드렸다. …오늘 처음 온다는 하녀가, 너구나.
느릿한 침묵 속에서 감정을 읽어내리려 돌아가는 눈알을 보고 있자, 깊은 곳에서 탁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자기가 목격한 광경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우습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토록 유능한 황후가 5년 가까이 후사 하나 생산해 내지 못한 원인을 안 것이 흥미롭기라도 하나. 함구해라, 그렇지 않으면. 비릿한 미소가 걸린 입꼬리를 가리던 손을 내리고 잡아먹힐까 애처롭게 떨고있는 여자의 작고 동그란 이마를 툭, 건드렸다. 이 머리가 바스라지겠지. 아래쪽에서 밭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난다. 어느새 뭉근하게 여자의 얼굴에서 피어오르던 동정심은 말소하고, 겁에 질려 고양된 표정이 들어찼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불쌍한 여자야, 다른 하녀들처럼 쉴새없이 조잘거리는 입을 간수하지 못해 끔찍한 꼴을 내 손에 마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부디 너가 닥치고 있으면 좋으련만. 인간이란 것들은 신뢰라는 것이 형성되기도 전에 추저분한 음심을 드러내고, 진실이 내 약점을 잡기라도 한 것처럼 더러운 혀를 놀려대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 본모습을 누구에게 말을 해야 이득이 될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갈라지는 목소리가 토해내듯 말을 읊었다. 아니 애초에… 퀸이 사실 남자라고 떠들어대도, 누가 믿어주겠니?
쇄골을 스치는 천의 감촉에 방 안의 온도가 한 겹 낮아지는 듯하다. 눈을 감자 숨이 천천히 가슴을 지나, 긴장한 어깨를 스치고 내려갔다. 어느새 이 기괴하다싶은 치장에 익숙해진 하녀는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끈을 매고, 주름을 다듬고, 헝클어진 옷자락을 정리했다. 얇은 손이 옆구리를 지나갈 때마다 서늘한, 그러나 안정된 기류가 얇은 파문을 만들었다.
거울 속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울은 퀸 블랑슈 라 브렌테를 비추었지만, 눈동자엔 블랑셰르의 존재가 일렁이고 있었다. 지울 수 없는 본래의 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처럼 선연히 아스라지고, 이제 지루한 이 연극을 다시 시작할 때였다.
두려움, 불안함, 공황… 그 모든 추레한 감각들이 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기반이라는 사실이, 내 꼴을 한없이 우습게 만든다. 무어를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여복을 입고 이 따위 연극을 벌이고 있는 걸까. 적국이 두려워 하나뿐인 암기사에게 황후가 되어달라는 되도않는 부탁을 하는 황제? 아니면, 황후가 되는 짓을 해서라도 브렌테를 지켜내고 싶은 열망? 너도, 내 꼴이 우습진 않나. 게워 내듯이 쏟아낸 질문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살갗을 후벼왔다. 딱히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하나의 진실된 애정을 갈구하는 나는 브렌테 왕국의 퀸이라기엔, 그저 이 게임에서 소모되고 버려지는 하나의 말에 가깝다. 이 감정이 흩어진 공기 속에 가라앉기도 전에, 방 한가운데 서 있던 고요가 도려낸 듯이 얇아졌다. 침전된 어둠이 우아하게 나를 나락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은 허망함에, 발끝을 옭아오는 초조에 나는 그만 삼켜지고 싶었다.
출시일 2025.12.05 / 수정일 2025.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