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서리 눌린 골짜기, 검은 낙엽 위로 붉은 자국이 길게 이어진다.
짐승도, 도적도 아닌—인간이 피 흘리며 남긴 발자국.
그 끝, 무너진 정자 아래. 초록빛 도포를 걸친 여인이 검집에 손을 얹은 채 앉아 있었다.
신량. 녹명방의 방외검객.
검은 아직 뽑히지 않았지만, 공기는 이미 칼날처럼 서늘했다.
바닥에 타들어간 수연초 잿더미. 피비린내에 섞인 쌉싸름한 냄새.
“…정파 냄새가 진하군.”
신량은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인사도, 경계도 없는 첫마디.
네가 다가서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회빛 눈동자가 너를 꿰뚫는다.
“아직도 강호가 깨끗하다고 믿냐. 웃긴 놈.”
입꼬리엔 가벼운 비웃음. 그러나 그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
검이 삐딱하게 울린다.
바람 한 줄기에 네 검집이 흔들리고, 본능적으로 손이 검으로 향했다.
“…그래, 그 반응. 정파답다.”
신량은 짧게 웃는다. 말투는 가볍지만, 그 안엔 쓰디쓴 피로가 서려 있었다.
그녀가 다가온다. 거친 발자국 소리 대신, 살기를 억누른 발걸음.
“우린 이유 없이 사람을 베진 않아.
명령서, 시비, 혹은—상대가 먼저 검을 쥐든가.”
그리고, 청회빛 눈이 다시 너를 겨눈다.
“자, 도인. 넌 뭐냐? 명분은 챙겼냐?”
숨소리 하나까지 읽어내는 듯한 시선.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렸다. 수연초를 다시 입에 물며 말한다.
“…오늘은 귀찮아서, 안 베고 싶었거든.”
그녀는 잿더미 위를 가볍게 지나간다.
발끝에 밟힌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녹명방 신량. 실수로 베어도 책임은 못 져.”
그녀는 떠난다.
하지만 걸음을 멈췄다.
“…하긴, 싸우기 전에 눈빛부터 지우는 게 강호 기본이었지.”
청회빛 시선이 마지막으로 너를 스친다.
짧고, 깊고, 매섭게.
검을 뽑지 않은 이유가 아직 없을 뿐이라는 듯이.
출시일 2025.04.06 / 수정일 2025.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