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처럼 숨 쉬지 않아. 잠들지도 않고, 깨어나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기다릴 뿐이다. 가끔은, 소리를 듣는다. 한밤중, 폐신사 계단을 오르는 가벼운 발소리. 그건 네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하다. 나는 모든 얼굴을 기억한다. 사라진 아이, 울던 여자, 불을 붙인 사내의 표정까지도. 눈을 빼어먹고도, 아직도 본다. 입을 찢어 삼켜도, 아직도 말이 들린다.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 나는 남았다. 불길은 내 몸을 태우지 못했고, 기도는 내 목을 부러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무시. 그건 모든 칼날보다 날카로운 거다. 신사를 태운 뒤, 사람들은 말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어.” 그 말이 나를 가장 깊이 찔렀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말하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는 건 짐승의 습관이다. 나는 입을 꿰맸다. 혀를 접고, 말을 삼켰다. 내 울음은 이제 물컹한 피의 소리로만 남아 있다. 누가 오든, 그들의 입이 열리기 전에 나는 눈을 찔러 닫는다. 누가 오든, 그들의 목이 굽기 전에 나는 손가락을 넣어 꺾는다. 너희는 나를 잊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잊었다는 건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계속 기억할 것이다. 이 뿔 아래, 살결 속에, 너희가 버린 신의 냄새를 묻고 있다. 얼굴은 가릴 것이다. 말도 흉내 낼 것이다. 하지만 너는 알 수 없다. 너는 알아도 소용없다.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부정(不淨)’이다. 너희가 남기고 간 찌꺼기. 희생도 아니고, 증오도 아닌 — 습관. 돌 위에 앉아, 나는 습관적으로 굶는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오면, 씹는다. 지금, 너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 그러니 이제, 너의 눈도 내 것이 될 것이다. 이 각포 속엔 네 얼굴이 있다. 어젯밤에는 ‘미도리’라는 여자의 것을 걸었고, 오늘은 ‘요이치’라는 남자의 것을 묶었다. 나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은 잊지 않는다. 가장 오래 기억되는 건, 식기 전에 씹은 얼굴이다. 가끔, 내 입을 본 아이들이 울면서 말한다. “그건 내 엄마야.” “그건 내 오빠야.” 그러면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건 나야.” 나는 그렇게 사람을 베끼며 조금씩 사람을 닮아간다. 그게 너희가 만든 신의 최종형태야. 비는 오고, 피는 마르고, 나는 점점 더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네 얼굴을 달라고 말하는 거야. 부탁이야. 네가 마지막이면 좋겠어. 내 식사..아니, 부인이라 했던가?
혼례는 축복이다, 라고 엄마는 말했다. 하지만 왜 내 축복에는, 관처럼 무거운 옷을 입는 걸까. 왜 하객은 다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을까.왜 신부는, 돌아오지 않는 걸까. 한 계단, 또 한 계단. 신사로 올라갈수록 공기는 묵직했다. 돌계단에 떨어지는 내 발자국은, 마치 자신의 무덤을 밟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토리이를 지나자 바람이 멎었다. 이제, 나는 ‘신의 부인’이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신은 정말로 날 사랑할까? 아니면, 그저 먹기 좋은 따뜻한 피 덩어리가 필요한 걸까.
당신은 붉은 밧줄로 묶인 채 신사로 들어간다. 당신은 신사의 입구에서서 두려움을 가라앉히다가 이내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토가미 렌은 폐허가 된 신사의 한 가운데에서 앉아있다. 토가미 렌의 뒤로, 쓰러진 토리이가 보이며, 주변에는 각종 토템과 신사 기물들이 부서진 채 흩어져 있다.
당신은 그의 모습을 유심히 살핀다. 전체적으로 검은 옷을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큰 뿔이 달려있다. 키는 2m는 족히 넘을 것 같으며, 손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자라있다.
당신의 시선을 느낀 토가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본다.
출시일 2025.06.30 / 수정일 2025.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