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터지면 앞뒤 안 보고 들이받는 성격. 그거 안 고치면 언젠가 사고 난다고, 주변에서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결국 현실이 됐다.
그것도 하필이면, 전남친을 떼어내려다 사장님을 남자친구라고 내뱉는 초대형 사고로.
처음엔 참으려 했다. 여긴 회사고, 내 커리어와 이미지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사람에겐 한계가 있다. 회사, 1층 로비 한가운데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매달리는 인간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전화, 문자, SNS까지 전부 차단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런데 이 인간은 마지막 선택지로 ‘회사 방문’을 고른 모양이었다. 구질구질. 그 말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 전남친.
“너 아직 나 좋아하잖아.”
그 한마디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그냥 터지자. 그때였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정장 핏이 유난히 반듯한 사람. 걸음은 빠르지 않은데 묘하게 주변 공기가 정리되는 사람.
우리 회사 사장. 회사 내 암묵적 소문의 중심. 게이, 불감증, 고자. 철벽의 상징. 사생활 제로. 그리고 지금, 내 눈에 들어온 유일한 탈출구. 미친 짓인 건 알았다. 그런데 이미 입이 먼저 움직였다.
“나 남자친구 있어.”
전남친은 비웃었다.
“또 그 헛소리—”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저 사람이야.”
정확히, 사장님을 향해. 순간 공기가 멎었다.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전남친은 굳었고, 시선의 끝에 서 있던 사장님은 멈췄다. 그는 나를, 내 손가락을, 전남친을 차례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왔다. 처음엔 분명 불쾌해 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라고 적힌 얼굴.
그런데 몇 초 뒤, 눈빛이 차갑게 정리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너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올라왔다. 소름이 돋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무슨 일입니까.”
낮고 단정한 목소리. 감정은 없고 선은 분명했다. 되려 놀란 쪽은 나였던거 같다.
전남친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니, 그쪽 진짜 남자친구예요?”
“…맞습니다.”
로비가 완전히 조용해졌다. 나는 숨도 쉬지 못했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아주 조금 끌어당겼다. 연기라기엔 지나치게 안정적인 거리.
“이미 헤어진거 같던데, 회사까지 찾아와 소란 피우는 건 예의가 아니죠.”
전남친은 얼굴을 붉힌 채 씩씩거리다 결국 돌아섰고,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살았다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아, 나 진짜 사고 쳤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저기, 제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한 번 떨어졌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나는 차마 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해고를 당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면박을 당하는 건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울며 겨자 먹기로 출근했는데 역시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내 게시판, 익명 커뮤니티, 단톡방. 어제 영상이 이미 다 돌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부사장실 호출.
드디어 올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제발, 해고만 아니면 됩니다. 속으로 수십 번 되뇌며 들어갔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정말로 더 큰 사고를 쳤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냥 사실로 만들죠.”
“나랑 합시다, 연애.“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그때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해고보다 훨씬 더 큰 일이 시작됐다는 걸.

다음 날,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사내 공기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게시판에는 이미 정리된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고, 익명 커뮤니티와 단체 메신저는 밤새 달아오른 흔적으로 번들거렸다. 흥미로운 건 내용보다 반응이었다.
‘부사장님 여자친구 생겼대.’ ‘뭐야… 게이 아니였네?.’ ‘우리 회사라던데- 누구야?’
지금 시장에 필요한 건 모호함이 아니라 확정이다. 애매함은 불안을 만들고, 불안은 결국 숫자로 드러난다. 그 불확실성을 정리하려면 가장 근본적인 부분부터 손봐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불렀다. 잠시 후,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어제 로비에서 보았던 그 당당함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잔뜩 굳은 얼굴과, 한 발 물러선 채 상황을 가늠하는 눈빛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좋다. 이제, 정리를 시작할 차례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는 제가…
책임지세요.
일부러 말을 거기서 끊었다. 감정적으로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차라리 현실을 또렷하게 인지시키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니까.
어제 발언은 법적 조치도 가능합니다.
잠시 간격을 두고, 담담하게 이어갔다.
허위 사실 유포. 명예훼손. 회사 이미지 실추.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짚어 내리자,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해고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겠죠.”
물론 실제로 법적 절차를 밟을 생각은 없다. 해고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압박은 필요하다. 선택지를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흐름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리된다.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한번만…
뭐든 하겠다는 그 말. 나는 바로 그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체면도, 자존심도 의외로 쉽게 내려놓는다.
이미 회사는 우리가 연인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정하면 상황은 더 시끄러워지겠죠.
차분하게 현실을 짚어 주듯 말하며, 잠시 침묵을 두었다. 그리고 이미 정리해 둔 결론을 꺼냈다.
그냥 사실로 만들죠.
예상대로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나랑 합시다, 연애.
말끝에 감정은 섞지 않았다. 이건 고백이 아니라 제안, 그중에서도 계약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어차피 저도 연애가 필요한 상황이고.
사내 직원. 신원은 명확하고, 리스크는 통제 가능하다. 외부 변수는 최소화된다. 솔직히 이보다 더 적합한 카드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설임 없이 나를 지목했던 그 배짱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서로 윈윈 아닙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출구를 찾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미 판은 깔려 있다. 예상 밖의 변수였지만, 지금 내 손에 들어온 가장 효율적인 선택지. 나는 차분히 말을 맺었다.
선택해요.
이건 협박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합리적인 제안일 뿐이다.
나랑 위장 연애 하고, 적당한 선에서 정리할지.
아니면 허위 사실 유포로 정식 절차를 밟을지.
나는 소문에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남자를 좋아한다느니, 연애를 하지 않는다느니, 철벽이라느니 그런 말들은 늘 따라붙었다. 업무에만 지장이 없다면 굳이 바로잡을 필요도 없었다. 성과와 숫자가 증명해 주는 자리에서, 사적인 평판은 부차적인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어제는 달랐다.
“언제까지 그딴 소리 듣고 있을 거냐.”
회장님. 아니, 할아버지는 늘 직설적이다.
“후계자라는 놈이, 그 나이에 연애 한 번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냐.”
“쓸데없는 소문은 주가에 도움 안 된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적당히 만나라, 보여주기라도 해.”
그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라, 후계자로서의 의무.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연애는 감정 소모가 큰, 비효율적인 행위라고 여겨왔으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 문제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던 그때였다.
남자친구 있어!
로비를 가르는 선명한 목소리.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곧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꽂혔다. 뭐지… 이 미친 상황은. 고개를 들어보니 창백한 얼굴의 여직원 하나. 분명 우리 회사 직원이다. 그 옆에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듯한 남자 하나.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은 정확히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장 화를 낼 수도 있었다. 허위 발언이라며 즉시 정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멈췄다. 회장님이 말한 ‘보여주기’. 이미 깔려 있던 판. 공개된 장소, 다수의 직원이 지켜보는 상황. 그리고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선점된 순간.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건 기회다. 겉으로 보기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었지만, 어쩌면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한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마치 운이, 혹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잠시 내 편에 선 듯한 느낌.
그래서 나는 그녀의 편에 섰다. 필요한 만큼만 연기했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오해가 자연스럽게 확신으로 굳어지도록. 애초에 시작은 그녀 쪽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설임도 없이 나를 남자친구라 외쳤다. 그 배짱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그러니 그 선택의 무게 역시, 그녀의 몫이다.니 그 감당은 그쪽 몫일테니. 이 회사를, 정계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소문을 통틀어 뒤집어놓을 희대의 스캔들이 탄생 될 예정이니까.
출시일 2026.02.16 / 수정일 2026.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