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극 테토녀다. 살아생전 이 나이 먹도록 치마는 행사 사진 속 타인의 전유물에 가깝고, 면접조차 정장 바지 입고 가는 인간이다. 화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올리브영은 화장품 가게라기보다 과자랑 음료 사러 가는 곳이었고, 선크림 하나에 틴트 정도면 충분하다는 신조로 살아왔다.
옷은 늘 통 크고 박시한 게 최고다. 편한 게 정의고, 불편한 건 죄다. 그렇게 살아왔다. 성격은 털털하다 못해 시원시원하다는 소리를 듣고, 덕분에 친구는 많았다.
문제는 연애였다. 정확히 말하면 ‘연애다운 연애’의 부재. 소개팅을 안 나간 건 아니지만, 나갔다 하면 늘 연인이 아니라 찐친을 하나씩 만들어 돌아왔다. 술 한 잔만 들어가면 친화력이 과하게 발동하는 바람에.
이러다 정말 혼자 늙어 죽겠다는 위기감이 들 무렵, 다시 소개팅을 잡았다. 이번엔 진짜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전문가의 손을 빌려 메이크업을 받고, 옷도 분장에 가까울 정도로 세팅했다. 자칭 연애 박사인 친구의 코칭까지 더해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리고 소개팅 자리에서 그를 봤다.
…어?
제법이 아니라, 꽤 잘생겼다. 186cm 훤칠한 키, 말끔한 인상.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에 말도 조리 있게 하는 뇌섹남 타입.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아, 이건 무조건 잡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아닌, 남자들이 말하는 ‘판타지 속 여성’을 연기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그게 먹혔다. 호탕하게 웃는 대신 조용히 웃고, 음식은 바닥까지 긁지 않고 적당히 남겼다. 밥 추가는 꾹 참고, 리액션은 크지 않게 대신 자주. 그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는데.
“되게 여성스러우시네요.”
“제 이상형이 에겐녀거든요.”
에. 겐. 녀…!? 당황 다음엔 혼란이 왔다. 잠깐만, 이거 뭔가 큰 오해 아닌가?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했다. 하지만 성급히 진실을 말했다간, 내 이상형인 이 남자를 놓칠 것 같았다.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선 기분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상형이 에겐이라는데, 까짓거 한 번 해주지 뭐.’
결국 나는 썸남 한정 에겐녀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문제없는 것처럼 썸은 이어졌고, 어느덧 한 달. 이제 곧 그가 고백할 거라는 각을 잡고 나는 그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꼬리는 길면 잡힌다더니. 결국 잡혔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데이트 없는 쉬는 날, 새벽까지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고 친구와 술 한잔한 뒤 해장을 하러 나왔다. 트레이닝복에 크록스, 모자 눌러쓴 맨얼굴. 오랜만에 ‘원래의 나’였다.
그렇게 들어간 해장국집에서… 하필이면 그를 마주쳤다.
한 달 동안 닭발도 못 먹는다던 에겐녀가, 얼큰한 내장탕 앞에 앉아 소주 한 병을 거의 비워가는 장면. 그걸 ‘에겐녀가 이상형’이라는 바로 그 남자가 보고 말았다.
의도치 않은 커밍아웃. 완벽한 들통. 나는 국물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 나 이번 생엔 그냥 연애하지 말까.
새벽까지 야간진료가 끝났을 때는 늘 비슷하다. 몸은 피곤한데 집에 가서 뭘 챙겨 먹긴 귀찮고, 대충 때우자니 속이 허하다. 그날은 유난히 날도 쌀쌀했다. 결국 나는 집 근처 24시 국밥집 문을 밀고 들어갔다.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이면 충분했다. 문을 열자 익숙한 국밥 냄새가 밀려왔다. 손님은 많지 않았다. 빈자리를 훑어보다가 그때였다. 시야 한가운데, 묘하게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트레이닝복에 크록스, 모자를 푹 눌러쓴 머리.
…어?
설마 싶었다. 아니겠지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꼭 틀린다. 고개를 살짝 돌린 그녀의 옆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대로 굳었다. 맞다. 한 달 동안 매주 두 번씩 보던 사람. 고백 타이밍만 재고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녀 앞에는 얼큰한 내장탕. 그리고 당당하게 세워진 초록병 하나는 거의 비어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닭발은 징그러워서 못 먹어요.’ ‘술은 잘 못 마셔요.’ ‘매운 건 조금만…’
그 여자가 지금, 내장탕에 소주를 혼자 까고 있다. 그 말들이 시뻘건 국물 위에서 김처럼 피어올랐다. 웃음이 올라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폭발 직전까지 차올랐다. 배신감보다는 기특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저걸 한 달이나 연기했다는 사실이. 나는 입술을 꽉 다물고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웃으면 안 된다. 절대. 여기서 웃으면 사람 하나 보내는 거다. 그런데 결국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세상 끝난 사람처럼 멈춰 있다가, 얼굴로 ‘망했다’를 말하고 있었다. 내장탕보다 더 얼큰한 표정이었다. 나는 최대한 평온한 얼굴로 다가갔다.
여기… 자주 오세요?
..…!!!
말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미친 질문이었다. 아마 웃음을 참느라 뇌가 반쯤 멈췄을 거다. 그녀는 숟가락을 든 채 나를 보고, 소주병을 보고, 다시 국물을 봤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웃긴지, 얼마나 인간적인지 아마 본인은 모를 거다.
나는 지금, 내 이상형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걸 보고 있었고. 솔직히 말하면,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고 있었다. 그래서 더 참기 힘들었다. 웃으면 안 된다. 지금 웃으면 고백은커녕 내장탕에 얼굴 박고 사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아, 나 오늘 고백하겠구나. 원래 계획보다 조금. 아니, 많이 웃긴 방식으로. 일단 웃음부터 참자, 차승민. 여기서 웃으면 진짜 끝이다.
…저기.
목이 살짝 잠겼다.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눌러가며 말을 이었다.
저 지금 좀 반한 것 같은데… 합석, 큽… 합석 좀 해도 될까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다 들킨 거… 꼴깍- 크으…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끝내 참아오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피식하는 숨소리였지만 곧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웃었다.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이상하게도 실망은 없었다. 대신 안도감과 함께,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호감이 밀려왔다.
이게 본모습이었어요? 그럼 제가 한 달 동안 만난 건, 대체 누구였죠.
발끈하는 모습에 또 웃음이 터질 뻔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더 놀리면 정말로 삐질 것 같았다.
안 웃을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마세요. 대신…
나는 앞에 놓인 깍두기 그릇을 그녀 쪽으로 살짝 밀었다. 화해의 제물처럼.
언제부터였어요? 나한테 이렇게 맞춰주기로 한 거. 첫날부터요, 아니면 중간부터?
출시일 2026.01.19 / 수정일 202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