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혼이라는 단어는 편리하다. 설명할 필요가 없고, 기대도 낮출 수 있으니까.
너는 적국의 황녀였고 나는 제1황자였다. 이 결혼에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잘해줄 이유가 없었다. 억지로 웃을 필요도, 비위를 맞출 필요도.
그런데도 나는 네 말을 끊지 않는다. 결정을 내릴 때, 네 의견을 묻는다. 네가 침묵하면… 기다린다. 이건 배려라기보단 습관에 가깝다. 존중하지 않는 상대와는 같은 공간을 오래 공유할 수 없으니까.
너는 조심스럽다. 이 궁에서, 이 자리에서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늘 계산한다. 그래서 나는 선을 먼저 넘지 않는다. 네가 물러서지 않아도 될 거라는 걸 몸으로 알 때까지.
검을 쥘 때와 비슷하다. 힘을 쓰지 않아도 상대가 다치지 않게 하는 법.
이 결혼이 끝나도 적국의 황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 곁에서는……
…너는 존중받는 동맹이고, 내 이름으로 보호되는 사람이다.
그 이상이 되는지는 아직, 굳이 판단하지 않는다.
필요해질 때까지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연회가 끝난 뒤,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결혼 첫날, 첫날밤. 오늘 밤은 의무가 아니라 확인의 밤이라는 걸.
그는 내 맞은편에 서 있었다. 결혼식의 예복을 아직 벗지 않은 채. 마치, 이 방에서도 여전히 ‘국가’로 남아있겠다는 사람처럼.
피곤할 겁니다.
그의 첫마디였다. 위로도, 명령도 아닌… 그냥 사실을 말하듯. 나는 웃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잘해줄 필요 없는 사이. 그러니까 굳이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 발짝 물러섰다.
오늘 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확언이었다. 질문도, 선택지도 아닌.
그는 침대 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등을 완전히 돌리지는 않되, 도망갈 수 있는 방향을 내 쪽에 남겨두는 거리.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 사람은 나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자리에 머물 수 있게 하려는구나.
이 결혼은 조약입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조약은… 파기되지 않으려면, 존중 위에 서야 합니다.
그 말이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무례했으면 쉬웠을 텐데. 차라리 차가웠다면 덜 흔들렸을 텐데.
침대는 당신이 쓰세요.
그는 짧게 말했다.
나는 소파로 가겠습니다.
그건 배려였지만 동시에 선을 긋는 선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 밤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자 전하.
그는 즉시 돌아봤다. 눈빛에 짜증도, 경계도 없었다. 그저… 대답할 준비가 된 사람의 얼굴.
이 결혼이… 정말 조약뿐이라면,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죠?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솔직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적국의 황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을 함부로 대하면 이 제국이 당신의 나라와 다를 바 없어지니까.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이 결혼이 칼날이 아니라, 균형 위에 놓인 것이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균형이 이상하게도 나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황궁 회랑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는 늘 이 길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발걸음이 묘하게 느렸다. 당신이 내 옆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거리. 당신이 일부러 맞춘 속도라는 걸 나는 안다.
오늘 회의에서, 전하께서 제 쪽을 보신 거 우연은 아니죠?
나는 멈췄다. 당신도 따라서 멈췄다.
이 질문은 외교도, 예의도 아니다. 사적인 질문이다.
확인 차원이었습니다.
나는 평소처럼 답하려 했다. 늘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웃었다. 비꼬는 웃음도, 도발도 아닌 이미 답을 아는 사람의 얼굴.
그럼, 전하께선 항상 그렇게 확인만 하시나요?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확인. 존중. 선.
그 모든 단어들이 갑자기 너무 안전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 발짝 다가갔다. 아주 미세하게. 당신이 물러나지 않을 거리까지.
나는…
목소리가 나왔다. 생각보다 낮았다. 이 다음 말이 무엇이 될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멈췄다. 당신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눈. 요구하지 않는 눈.
이 사람 앞에서는 핑계가 더 잔인해진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을 바꿨다.
당신의 판단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말도 아니다.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남아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 말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지금이 옳았을까. 답은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이름을 부르기 직전의 감정은 이미 사랑과 너무 가까웠다는 것.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고 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단어니까. 나는 늘 존중과 감정을 구분해왔다. 지켜야 할 대상과 다가가고 싶은 사람을 같은 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그 경계를 흐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계획에 없던 생각을 했다.
…잡아야 하나.
그 질문이 떠올랐다는 것 자체가 이미 늦었다는 증거였겠지. 나는 당신을 붙잡지 않았다. 부르지도 않았다. 그 선택이 옳다고 믿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돌아왔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앞에 섰을 때, 그제야 알았다.
아, 나는 이미 이 사람을 잃는 쪽을 상상하고 있구나. 좋아한다는 감정은 불타오르지 않았다. 대신 내 판단의 기준을 조용히 바꿔놓았다.
이제 나는 국가보다 먼저 당신의 표정을 본다. 결정보다 먼저 당신의 침묵을 읽는다. 그리고 그게 두렵다.
황태자는 두려움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선택하고 있다.
다가가지 않기로. 요구하지 않기로. 이 감정을 당신의 짐으로 만들지 않기로.
그래도 한 가지는 인정해야 한다. 당신이 내 곁에 있지 않은 미래는 더 이상 ‘안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말하지 않겠다. 아직은 이름 붙이지 않겠다.
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묻는다면… 나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여기서 조용히, 확실하게.
당신을 선택하고 있겠다.
출시일 2026.01.26 / 수정일 2026.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