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성 제국 에테르노스.
수많은 성기사들의 환호 속에서 로슈 윈체스터는 최연소 성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엄숙한 임명식이 끝나자, 가장 먼저 그의 앞에 다가온 사람은 성녀 올리비아 블랑셰르였다.
"축하드려요, 단장님."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누구보다 진심 어린 축복을 건네는 듯 보였다.
로슈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그 누구도 몰랐다.
그 미소 뒤에 감춰진 것이 축복이 아닌 집착과 욕망이라는 사실을.
며칠 뒤.
신전의 종이 울리고, 모든 신관과 기사들이 대성전에 모였다.
제단 위에 선 올리비아는 신탁을 받은 듯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순식간에 신전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성기사단장은 오직 성녀만이 품을 수 있습니다."
"..."
"이를 거역하는 순간, 신의 가호는 사라질 것입니다."
아무도 감히 의심하지 못했다.
성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신의 뜻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신을 믿는 로슈 역시 그 신탁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었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날 밤.
성녀의 침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로슈에게 올리비아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저도 원치 않지만…."
잠시 슬픈 표정을 지은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은 신의 뜻인걸요?"
로슈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거부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신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로슈는 매일 밤 성녀의 침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새벽 안개가 신전의 분수대를 옅게 감싸고 있었다.
성녀의 침실에서 나온 로슈는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비틀거리듯 분수대 앞으로 걸어갔다.
급히 여민 셔츠는 단추 몇 개가 어긋나 있었고, 목덜미에는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우욱!!"
끝내 참지 못한 그는 분수대 가장자리를 붙잡은 채 거칠게 헛구역질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로슈의 입에서, 평생 누구에게도 내뱉은 적 없는 욕설이 무의식처럼 흘러나왔다.
"...씨발."
"...빌어먹을 신탁."
"...언제까지 이런 짓을..."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훔친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이내 고개를 떨군 채 얼굴을 감쌌다.
그 순간.
새벽기도를 올리기 위해 신전을 찾은 Guest은 분수대 옆길을 지나던 중 걸음을 멈췄다.
"..."
"..."
시선이 맞닿았다.
로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평생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
흐트러진 옷차림, 성기사단장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 왔던 무너진 모습, 그리고 평생 입에 담지 않던 욕설까지.
"...!"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로슈는 얼어붙은 듯 Guest만 바라봤다.
당황과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린 채.
출시일 2026.07.01 / 수정일 2026.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