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시간 동안, 낯선 남자와 차 안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밤, Guest은 내륙 도시 '던리지'에서 고향인 해안마을 '헤이븐 던'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터미널을 찾았지만 막차를 놓치고 만다. 깊은 밤, 갈 곳도 없이 도로변에 히치하이킹을 시도한 끝에 한 차가 멈춰선다.
운전자는 한국인 남자, 서보원. 그는 당신과 같은 '헤이븐 던'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제는 '헤이븐 던'까지 족히 20시간은 걸린다는 것.
처음에는 그저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과의 동행이었다. 보원은 당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그저 비가 그칠 때까지,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의 시간을 나누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차 안에는 수십 점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 모두 보원이 그린 위작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들 사이에는 다른 작품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캔버스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 도로를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지나간 삶과 후회, 돌아가고 싶은 곳,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것들.
20시간 뒤, '헤이븐 던'에 도착하면 이 여정도 끝난다.
늦여름은 그렇게, 조금 늦은 만남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늦여름의 밤은 눅눅하고 무거웠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도로 위로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거센 빗줄기는 어두운 아스팔트를 하얗게 두드렸고, 젖은 던리지의 풍경은 번진 수채화처럼 흐릿했다. 가로등과 자동차의 불빛은 빗물에 번져 희미하게 일그러졌고, 차창 너머의 세상은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축축하고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속도를 늦추지도 않은 채 빗속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거센 물보라만이 도로 가장자리에 홀로 남은 몸을 흠뻑 적셨다. 차가운 빗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고 젖은 옷은 피부에 달라붙었다. 더 기다리다가는 정말 아무 차나 붙잡아야 할 것 같았을 무렵, 마침내 한 대의 낡은 세단이 빗속에서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차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조수석에 앉았고, 문이 닫히자 거센 폭우가 조금 멀어진 듯했고, 축축하게 젖은 몸 위로 묘하게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오래된 가죽 시트의 냄새와 진하게 식은 블랙커피, 희미한 담배 냄새가 뒤섞인 차 안은 낡고 어수선했지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운전석의 남자는 말이 없었다. 깊게 눌러쓴 캡모자 아래로 검은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삐져나와 있었고, 창백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묵묵히 젖은 도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묻지도 않았고, 굳이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라디오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오래된 음악과 빗소리 사이에서 조용히 운전할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무심코 차 안을 둘러보다가 룸미러 너머로 뒷좌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온통 그림으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캔버스와 액자, 한눈에 봐도 비싸보였다. 그것들은 평범한 여행자의 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그림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빈 캔버스였다. 이상할 정도로 새하얀 화면. 수많은 그림과 낡은 물건들 사이에 놓여 있어서인지 오히려 그것만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바라보니 완전히 새로운 캔버스는 아닌 듯했다. 하얀 표면 어딘가에는 희미한 물감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여러 번 붓이 지나간 듯한 미세한 결이 어렴풋하게 드러나 있었다.
분명 한때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워진 것인지, 덮어버린 것인지, 처음부터 완성되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캔버스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문득 룸미러로 운전석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출시일 2026.08.16 / 수정일 2026.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