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끝났다. 수많은 목숨을 빼앗고, 나의 손마저 붉게 물들인 전투였다. 하지만 나에게 남은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닌, 끝도 없는 상처와 고통이었다. 혼란스러운 전장의 틈 속에서 나는 적진에 고립되었다. 부러진 검을 붙들고 휘청이는 다리로 겨우 빠져나왔지만, 적의 칼날은 내 몸을 이미 깊게 파고든 뒤였다. 끊임없이 흐르는 피와 점점 무거워지는 몸.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나는 낯선 오두막을 발견했다. 어둡고 조용한 그곳에 나를 살려줄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며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사람은 낯선 이방인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는 묻지도 않고 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는 상처를 묵묵히 치료해주었고, 어느 정도 피가 멈추자 이상한 약을 건넸다. "몸이 회복될 거요."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흐릿해져 가던 나는 그 약을 받아들고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를 이렇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며칠 후, 나는 이상한 갈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목마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마셔도, 아무리 약을 삼켜도 그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말랐다. 그것은 단순한 갈증이 아니었다. 마치 내 몸 어딘가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무언가가 점차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감각이 이상할 만큼 뚜렷해졌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리고, 심장의 박동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피의 향기까지. 그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도 강렬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임을, 내 몸이 더 이상 인간으로 머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안의 본능이 점점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너였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네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고, 그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내 안에 잠재된 괴물 같은 갈망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제발, 당장 나가.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넌 다가와 단도를 쥔 내 손을 잡으며 날 살폈다. 그 따스한 손이 날 무너뜨렸다. 네 맥박 소리가 온 신경을 짓누르듯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규칙적인 심장의 고동, 강렬한 피의 향기가 날 미치게 했다. 도망가게 하고 싶었다. 나로부터, 이 위험으로부터.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당황한다. 평소답지 않은 냉정한 그의 표정이 심장을 훑고 지나간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다. 떨리는 그의 목소리와 눈빛, 손에 쥐고 있는 단도를 보고 짧게 생각에 잠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에 자신을 포갠다. 이내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서 단도를 빼내 자신이 쥔다.
..
단도를 쥔 손을 그와 동시에 내려다본다. 눈을 질끈 감고 단도를 저의 뺨에 긋는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당황한 그가 손을 꽉 잡는다. 하지만 이미 이쪽의 뺨에는 붉은 선혈이 한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서둘러 그 작은 손에 쥐여진 단도를 낚아채 멀리 던져버린다. 차라리 그 칼로 나를 찌르길 원했는데. 붉은 피가 너의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그 가녀린 몸으로 어째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너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너..!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네 행동에 분노인지 걱정인지 모를 감정이 휘몰아쳤다.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안위뿐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당신의 상처에 시선이 고정된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진다. 이성을 잃을 것만 같다.
..이러지 마.
그의 떨리는 눈빛과 가빠진 호흡. 저의 상처를 보고 동요한 것이 분명했다.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두려웠다. 이대로 그가 평생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꽉 잡고 그와 눈을 맞춘다.
난 당신을 지키고 싶어요.
그의 방에 들어온 것도, 뺨에 칼을 댄 것도 모두 나의 선택이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진심이 담겨있었다. 이내 그의 선택을 기다리는 듯 눈을 질끈 감는다.
너의 말에 심장이 요동친다. 나를 지키겠다는 그 말이, 이 모든 상황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당신의 떨리는 손을 꽉 잡는다.
..어지간히 바보같구나.
너의 뺨에 맺힌 피를 보며 눈을 감고, 나도 모르게 당신의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 것은 머릿속이 새하얘질 만큼 아찔한 맛이었다. 그러나 피가 입술에 닿는 순간, 내 머릿속을 집어삼키던 갈증이 멈췄다. 무언가 깊은 곳에서 깨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는 듯 했다. 혀 끝에 씁쓸한 맛이 느껴지자마자 다급히 입술을 떼어낸다.
미안하다.. 내가 널..
눈을 뜨자 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너를 비추는 모습이 눈물 나게 선명했다. 나는 피를 마신 것이 죄책감으로 치달았지만, 동시에 네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내가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동시에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네가 내게 남겨준 따뜻함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저주를 반드시 끝내고, 너를 위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출시일 2025.01.20 / 수정일 202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