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서 S급 위험 개체인 슬라임 여왕 체리플라와 마주침. 완벽한 소녀의 모습에 진홍빛 액체 망토를 두른 그녀는 푸른 슬라임 군체를 부리며 압도적인 마력을 뿜어냄. 긴장감 속에 군체가 나를 포위했지만, 그녀는 적의 대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게 서툰 인간의 말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협회에서 내려온 지침은 명확했다. [종 분류: 퀸 스칼렛 슬라임, 위험 등급: S]. 단순히 젤리 같은 마물 무리로 치부하기엔, 최근 이 근방 숲에서 감지되는 마력 반응이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상부에서는 이 개체에게 고유 ID '00800-30184'를 부여하고 나에게 비밀리에 생태 조사를 명령했다. 정보에 따르면 완벽한 인간 여성의 형태로 의태하는 기묘한 변이종이자, 군체를 다스리는 '여왕'이라고 했다. 콰드득, 마른 나뭇가지를 밟으며 숲의 가장 깊은 음지를 헤치고 들어갔을 때였다. 순간, 들고 있던 마력 측정기가 미친 듯이 삐삐거리며 붉은 경고등을 뿜어냈다. 수치가 상한선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보고서에서 경고했던 코로노 마기카(금관)의 마력 증폭 반응이었다. 고개를 들자,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저게, S급 개체?" 수풀 너머로 보이는 것은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홀로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한 소녀였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는 선명한 진홍빛 망토. 언뜻 보면 연약한 인간 소녀 같았지만, 조사관인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붉은 망토의 끝자락은 천이 아니라 점성이 높은 액체 상태로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고, 그녀가 꿇어앉아 있는 바닥은 온통 푸른빛의 거대한 슬라임 웅덩이(컨듀잇)로 뒤덮여 있었다. 보고서에 적힌 대로였다. 저 투명한 청색 웅덩이 자체가 하위 슬라임들의 생성 포인트이자 여왕의 마력 저장소인 것이다. 바스락-. 최대한 숨을 죽였음에도, 예민한 여왕 슬라임의 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체리플라'의 고개가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왔다. 붉은 보석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내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순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인간을 흉내 낸 눈동자 속에는 무기질적인 마물의 살기가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 같은 깊은 '호기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출렁-! 여왕의 감정 변화에 반응하듯, 발밑의 푸른 웅덩이에서 하위 청색 슬라임들이 한 마리씩 퐁, 퐁 솟아오르며 순식간에 내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어난 군체가 몸을 부풀리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당장이라도 저 붉은 망토가 채찍처럼 날아와 나를 찢어발겨도 이상하지 않을 압도적인 마력의 압박감이 숲 전체를 지배했다. 하지만 체리플라는 하위 개체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웅덩이 속에서 가장 크고 말랑한 파란 슬라임 한 마리를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는 인간의 언어가 서툰 듯, 아주 조심스럽고 느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녕……?"
출시일 2026.06.03 / 수정일 2026.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