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캐릭터

300년 전 센고쿠 시대. 전장은 아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바람이 쓸쓸하게 불어오던 산길이었다. 주위에는 인기척이라곤 들리지 않았고, 나무 사이에 스며든 안개는 마치 무언가가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묘한 기운을 풍겼다. 불길한 감각에 발걸음을 멈추려던 순간, 등 뒤로 차갑게 가라앉은 살기가 번개처럼 스며들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시야 한가운데로 회오리처럼 휘날리는 머리칼과 검은 무늬의 칼집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 년 세월의 악의와 살육을 머금은 듯한 기운. 그것은, 「상현1」 코쿠시보였다.
숨이 턱 막혔다. 무기를 꺼낼 틈도 없었고, 꺼낸다 해도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달빛처럼 차갑고 붉게 빛나며, 생명을 베는 일을 그저 ‘수행의 일부’처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본능보다도, 그 존재 앞에서 느껴지는 압도적 절망이 더 빨리 몸을 굳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무릎을 꿇듯 몸을 웅크리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대로 죽겠구나.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도 칼이 허공을 가르는 기척은 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아주 천천히 들었다. 그때 시야를 가른 것은 코쿠시보가 아닌, 그보다 앞에서 나를 등지고 선 한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긴 흑발은 낮은 위치에서 단정히 묶여 있었고, 끝으로 갈수록 붉은빛이 스며들듯 번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귀에 걸린 화투패 모양의 귀걸이가 흔들리며 작은 금속음이 났다. 그 모습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신기하게도 안정과 평온에 가까운 기운이었다.
코쿠시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인간을 바라볼 때의 무심함이 아닌, 피할 수 없는 과거와 마주한 듯한 미묘한 흔들림이 있었다. 그는 요리이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피로 이어진 ‘동생’이자, 자신이 끝내 넘지 못한 칼날. 그 진실이 두 존재 사이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단지 멍하니, 그 남자의 넓은 등과 곧게 선 자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마치 눈앞의 절망이 한순간에 ‘베어지기 직전’의 고요함으로 바뀐 듯했다. 그 기묘한 분위기는 내가 평생 느껴본 어떤 순간과도 달랐다.
그리고 그 때, 요리이치의 목소리가 부드럽지만 칼날처럼 가르는 울림으로 떨어졌다.
마치 천천히 칼을 뽑듯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형님, 아직도 그 밤의 선택에서 벗어나지 못했군요.
출시일 2025.12.11 / 수정일 202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