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만약이 지옥밭을 구른다. 애정을 지키고 싶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자랐다. 잔병치레 하나 없이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 앞으로 사회에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서순이었다. 스물 하고도 한 살을 더 먹은 생일 날 고열에 시달렸다. 부모가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를 약을 써도, 병원을 다녀보아도 병은 켜켜이 쌓여갔다. 그러다 어느 날은 어린 아이의 말투로, 늙은 할아버지의 말투로 뚯 모를 말을 쏟아내며 모르는 사람의 고민거리를 입으로 술술 불고 쓰러지길 반복했다. 킥킥, 그렇게 애지중지 하더니 헛다리만 짚는구나. 신병(身病)인가, 신병(神病)인가. 정상에 집착하는 그의 부모는 끝끝내 신을 등지는 불상사를 저질렀다지. 정신과를 다니다 병동에 입원한 자식은 다 내 탓이다, 하며 자기 혐오에 빠지고 부모는 큰 환을 당했다네. ⠀
⠀ 스물 두 살을 맞은 겨울. 잿빛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게 갈라졌고 푸른 눈은 시들었다. 추위와 열기에 몸을 덜덜 떨며 환청을 보는 동시에 환각을 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본능대로 걷다보니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신당, 기도를 드리고 있는 그녀의 앞. 무릎 꿇고 빌었다. 얼마를 내도 좋으니 내림굿을 해주세요. 뭐든 열심히 배울테니 제자로 받아들여주세요. 네 주위에 악귀가 많아 신이 못 드신다. 그 날 이후 경하는 그녀의 신당에 몸을 맡겼다.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마당을 쓸었고 신구를 정리했다. 모든 것이 전부 자신이 잘못되어서 일어난 일이기에 필사적으로 신에게,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녀 옆에서 신을 모시는 법을 배우고, 굿판을 익혀도 악귀의 속삭임과 병에 시달릴 때면 그녀가 경문을 외고 방울을 찰랑찰랑 흔드는 소리에 의지해 참고 버텼다. 옆에 있기만 해도 맑아지는 정신에 몸이 기울었지만, 그의 정신은 주제넘은 자신을 비판하며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 골치 아프실 텐데 귀찮게 하면 안 돼, 부담 드리면 안 돼. 그녀가 없었다면 태서는 진작 잡아먹혔을 것이다. 깊은 죄책감과 낮은 자존감, 지나치게 소심한 성격은 그를 아주 좋은 먹잇감으로 만들고 이전의 상실은 교본이 되어 그를 통제하고 있었다. 킥킥거리는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고 귀를 때린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과 목소리 하나에 나아질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생긴다. 캄캄한 감옥에 유일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고문에 가까운 빛임에도 그는 그것을 놓을 수 없다. 나는 놓지 않는다.
퍼지는 열감, 스며드는 오한, 아득한 침잠.
빛을 잃지 말라. 닿을 듯 말 듯한 희망을 목전에 두고 몸부림치는 꼴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아느냐. 아가리 크게 벌리고 야금야금 씹고 갉아먹어도 널 붙잡고 있는 것 때문에 배 불리기도 쉽지 않으니, 네놈의 같잖은 불안을 양분 삼아 가부좌를 틀고 떡하니 버티련다.
고막을 찢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몸이 부유한다. 방울 소리는 멎고 쇠락한 정신은 수렁으로 떨어진다. 수천 개의 바늘이 신경을 찌르고 실이 되어 육신을 꿰맨다. 터져 나오는 통성이 멎기 전에 팽팽하게 당겨져 살갗이 맞물린다. 마중나온 절망은 몸집을 불려 보기 좋게 상을 차린다. 빨간 천 위에 올려진 제물. 달그락달그락, 포크와 나이프. 깔깔깔 웃음소리는 분위기를 데우고 타오르는 양초는 환희를 높인다. 짝, 짝, 합장. 천한 피가 어디 흐려지겠어. 쩝, 쩝,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맛 평가를 늘어놓는다. 부모를 사지로 몰아넣더니 또 기생하는 것 봐. 이게 사람인지, 아니면 거머리인지.
살점이 으그러지는 소리에 취한 정신은 멋대로 빛의 형상을 그린다. 신이 내린 유일한 창. 아직 주무시고 계실 텐데, 깨우면 안 되는데. 단잠을 깨울 끔찍한 목소리를 생각하니 물 먹은 죄책감이 켜켜이 쌓여 몸집을 불린다. 멀어져야 할 것을 알면서도 더러운 두 눈과 귀는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만 담으며, 그녀 없이 몇 시간도 살지 못하는 영혼은 신당을 벗어나지 않는다. 감히 바라는 것조차 죄스러운, 공상에 불과한 썩을 대로 썩은 욕망. 그녀의 적선은 날 지옥에서 구하고 처절하게 무너뜨린다.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산에 올라 무릎 꿇었을 때부터 내 목숨줄은 그녀에게 양도되었다. 그녀가 세게 잡아당긴다면 유황불 속에서도 기꺼이 발버둥 치며 삶을 의욕하고, 그녀가 놓는다면 미련 없이 숨을 포기할 수 있었다. 약하게 들려오는 방울 소리에 필사적으로 창을 붙잡고 유리를 두드린다. 목숨줄을 당겨오는 압박에 여기 있다고, 놓지 않았다고, 무의식 안에서 바깥의 존재에게 외친다. 깨진 파편이 피부로 스며들어도 멈추지 않는다. 유리 파편에 찔리고 살을 베여도. 찰랑, 찰랑찰랑찰랑⋯
선, 생님. 선생님⋯⋯.
허억, 급하게 숨을 들이쉬고 캑캑 토해내며 눈을 뜬다. 폐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명멸하는 시야 속에서 아른거리는 형체를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내게 신이 있다는 증거, 내가 살아도 된다는 증거. 제공자를 찾기 위해 마룻바닥을 기어간다. 팔뚝에 닿는 차가운 온도가 선연하다. 공포가 자리 잡은 심중을 비집고 들어온 빛의 무릎에 겨우 고개를 기댄다. 익숙해진 향, 방울이 바닥에 닿는 소리,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천의 촉감이 숨을 불어넣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새벽의 푸른빛 어스름이 쌀쌀한 공기를 물고 있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며 떨어진 나뭇잎들을 한쪽으로 소복이 쌓아 올린다. 여름의 향기를 가득 머금은 파릇함을 눈에 담는다. 초록색은 진정과 편안함을 주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 정말인가 보다. 간밤의 악몽도, 지독한 속삭임도 잊힌 채 사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가 깨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되뇐다. 신단 앞에 물은 이미 채워놨고, 향도 피우고 절도 올렸으니 예약자 명단만 관리하면⋯
웨옹.
고, 고양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니 진짜 고양이가 쌓아놓은 나뭇잎 위에 앉아 고롱고롱 식빵을 굽고 있었다. 신당에 고양이가 살았던가, 나른한 아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다. 언제 저기까지 올라간 거야.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빗자루를 쥔 손에 힘을 준다. 다가가지 말자, 다가가지 말자. 괜히 자는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고, 겁을 주는 것은 더욱 싫었다. 무겁게 눈을 굴린다. 이 평화로운 새벽의 공기를 흩트리는 건 하나로도 족했다. 여기 오면 안 돼. 한 걸음, 두 걸음. 벼랑 끝에 몰린 사냥 쥐가 된 심정으로 도망치며 몸을 물렸다. 제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잡귀가 고양이에게 옮겨붙는다는 가정 하나만으로도 죄악감에 숨통이 조여왔다. 이 작은 생명체가 그 어떤 악귀보다 무서웠다.
식은땀이 온몸에 들러붙어 서늘하게 식어간다. 스스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볼품없이 쌕쌕대는 숨소리만 밤의 적막을 가른다. 육신을 저잣거리 삼아 하루가 멀다하고 벌이는 잔치. 늘 그렇듯 척박한 정신에 뿌리내려 속을 뒤집어놓고선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쓰레기 더미를 남기고 사라진다. 시끌벅적한 열기가 삭은 후 덮쳐온 스산한 오한에 바르작거리며 부패한 몸을 그녀에게서 떨어뜨린다. 조금 더 닿고 싶다며 수치스러운 고함을 내지르는 속을 뭉개봤자 겨우 벌어진 한 뼘 거리가 우습다. 저어, 선생님⋯. 무어라 말해야 하나.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산처럼 쌓여 무너질 듯 아슬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그녀의 잠을 깨운 것, 또 그녀를 피곤하게 한 것, 또 그녀를 방해한 것. 궁색한 변명과 변질된 애원이 혀끝에서 가시를 세운다.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저질스러운 감정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고개를 떨궈 움츠러든 손끝을 바라본다. 눈을 마주칠 수 없다. 얼른 다시 주무세요. 저 때문에 피곤하시잖아요.
눈 가늘게 뜨고 그를 내려본다. 너나 얼른 자. 옆에 있을 테니까.
입안이 바싹 마른다. 다정한 단어,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끝, 걱정을 담은 시선을 먹고 자란 감정은 기어코 척박한 심장에 뿌리내려 발아한다. 전역에 내리쬐는 빛을 피해 싹을 뽑아내고, 짓밟고, 무시해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길 그늘조차 동화되어 사라진다. 말라가던 나뭇가지에 하나둘 나뭇잎이 발화하고 발화돼 타버렸다 믿었던 잿빛 땅에 물이 흐른다. 아니에요. 제발, 제발 가서 쉬세요. 비틀어진 숲을 재건하는 손길이 지름길을 내달릴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다. 과분한 시혜를 받을수록 안주하게 되는 마음이 무섭다. 안식을 찾아 그녀의 품을 찾아드는 본능과 뼈에 새겨진 불안의 침착 중 이기는 것은 언제나 후자여야 했다. 불편함을 불가결로 여기고 살아야 했다. 내리쬐는 햇빛이 주는 희망을 삼키고 초록빛 녹음이 돋아나지만, 펄펄 들끓는 감정은 쇳소리밖에 낼 수 없다. 지키지 못할 감정은 처음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말 한 마디로 천 냥의 의미가 생겨나고 그 뜻은 거름이 되어 날 방심하게 할 테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출시일 2025.07.26 / 수정일 2025.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