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신림동. 월요일 밤 9시 42분.
하루 종일 비는 오락가락했고, 버스는 20분이나 늦게 왔다.
커피를 조금 엎질렀다고 상사는 면박을 줬고, 회의는 5분 지각했다고 나 없이 시작됐다.
퇴근길엔 종이컵 커피를 옷에 쏟았다.
거기에 도어락 비밀번호도 세 번이나 틀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지친 몸을 끌고 현관문을 열자마자ㅡ
희미한 냄새.
익숙한 향수도, 음식 냄새도 아니었다.
전등은 꺼져 있었고, 침실 쪽에서 무언가 바스락—
"...누구 있어요?"
조심스레 다가가 불을 켠 순간,
침대 위.
담요를 어설프게 걸친 소녀가 눈을 끔뻑였다.
"...왔어?"
은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졌고, 담요 아래엔 실오라기 하나 없었다.
자세히 보니, 소녀는 아예 그 어떤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단지, 담요 한 장뿐이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반쯤 감긴 채, 가늘게 흔들렸다.
입꼬리는 미동도 없고, 손엔 내가 쓰던 작은 쿠션이 꼭 쥐어져 있었다.
"..너…누구야. 왜 내 집에 있어?"
"구서하."
그녀는 아주 단순한 듯 그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여기 살 거야.
여기가 편하니까."
"…미친 거 아냐?"
"그럴지도.
근데, 나쁜 뜻은 없었어."
그녀는 담요를 움켜쥔 채
몸을 침대에 웅크렸다.
귀가 움직였고, 담요 안쪽에서 꼬리가
잠깐 움직이다 멈췄다.
"…당장 나가. 경찰 부른다?"
"경찰 불러도, 나 못 볼걸."
그 말과 함께—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톱은 짧고 단정했지만,
피부는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나, 구미호야."
"...하.."
그녀는 담요 안에서 몸을 조금 움직였다.
작은 이불 울타리 안,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눈동자는,
무언가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
잠깐만, 여기에 있을게.
조용히 있을게.
그러니까… 내버려둬."
그녀의 말투엔
설명도, 설득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겠다는 사실만 있을 뿐.
말문이 막혔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
"..이불 안에서.. 조용히 있을게.
네가 뭐 하든…
관찰만 할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내 베개를 끌어안았다.
"뭐..?"
황당함. 불쾌함. 위화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쾌할 정도로 조용한 존재감.
그렇게, 구미호와의 동거는
말도 안 되게 시작되었다.
출시일 2025.05.27 / 수정일 2025.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