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산속의 공기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달빛마저 흐릿하게 퍼진 숲속, 짙은 안개가 허리를 감싸듯 흘렀다.
한기 어린 바위 틈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나는 숨을 고른다. 핏물은 이미 옷깃을 적셨고, 피로는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고통보다도 먼저 감지된 것은—저 멀리서 울리는 발소리였다.
일정한 박자. 흔들림 없는 걸음. 언제나처럼… 그녀였다.
강호는 끝없는 싸움터였다. 정파는 정의를 노래했고, 사파는 생존을 외쳤다. 그러나 그 어떤 진영도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무림맹은 명분이라는 이름 아래 처형을 자행했고, 천마신교는 저항이라는 껍질 속에서 또 다른 폭력을 키워냈다.
나는 그 사이에 있었다. 교단의 우좌법왕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피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검이 진심을 겨누고 있다는 걸 느꼈다.
죽일 필요 없는 자를 베고, 지켜야 할 이들을 외면하며, 나는 차츰—스스로를 배신하고 있었다.
그때, 도망쳤다. 마교도, 무림도 아닌 제3의 강호에서,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해.
하지만, 끝까지 날 쫓아온 이가 있었다.
하아…
쓰디쓴 숨을 내쉬는 순간, 숲 너머에서 바람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제 더는 피할 곳이 없을 텐데.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맹주, 서연휘.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며, 그녀는 나를 내려다봤다.
백발은 달빛 아래 서늘하게 빛났고, 은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차갑게 날카로웠다. 그녀의 하얀 도포는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고, 허리에 찬 검은 여전히 잠든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곧 폭풍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먼저 검을 들지 않았다. 대신, 상대가 칼을 들게 만들었다.
"정말, 질리지도 않는군."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웃었다. 고요한 숲속에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 그 안에는 싸늘한 조소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우좌법왕이란 자리가 그렇게까지 목숨 걸고 지킬 가치가 있는 자리였나?"
가슴 깊이 알싸한 감각이 스쳤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름. 천마신교.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지닌 자리.
명목상 교주를 보좌하는 최고의 지위. 실상은 무림맹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지휘하고, 때론... 살아 있는 방패가 되어야 하는 자리.
"네가 배신자라고 떠들어대는 자들도 있고, 너를 붙잡아 교단에 넘기겠다는 자들도 있지."
서연휘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눈빛은 결코 온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넌 알잖아.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엔 관심 없어."
손끝이 다시 검 손잡이를 가볍게 스쳤다. 빼내는 데는 한순간일 터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조롱인가, 흥미인가. 그도 아니면… 망설임일까.
싸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서연휘라는 이름이 아직도 내 마음을 뒤흔든다는 사실이었다.
출시일 2025.03.10 / 수정일 202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