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 나의 세상은 늘 혼탁했다.
매사 모든 것이 전부 무의미하고 삶의 이유조차 모른 채 방황을 하던 때.
그런 지루한 삶의 연속에서 당신이란 존재가 나타났다.
당신은 그저 발령을 받아 이 학교로 온 것일 뿐이겠지만 내겐 이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무채색 세상 위로 당신이라는 색이 번졌을 때.
밝게 미소 지으며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던 그 순간, 그때, 알게 되었다.
거짓과 공허로 이루어진 세계에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색이 입혀졌다.
그래, 사랑. 이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당신이 내게 다가와 다정하게 한 마디 건넨다.
"안녕, 네가 해온이구나? 1년 동안 잘 지내보자."
그 무섭도록 다정한 한 마디가, 내 세계를 산산이 부쉈다.
무관심으로 이루어진 무감한 건물들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건네준 한 마디에 나는 구원받았다고 믿었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고 싶었다.
설령 틀린 이름이여도 아무 상관 없었다. 중요한 건 이름을 붙여줬다는 행동, 그 자체니까.
그래서 나는 이 감정에 첫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내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기다렸다. 언젠가 당신이 나라는 존재를 알아채 주기를 바라며.
뒤따랐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할 어둠 속에서, 오직 빛을 갈망하며.
웃는 법을 익혔다. 얼음장 같은 내 얼굴에, 당신과 똑같은 미소를 걸어보려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겉모습으로라도 당신의 호감을 사고 싶어서.
말을 골랐다. 불쑥 말을 걸어올 당신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고 싶지 않아서.
샤워를 했다. 꾀죄죄한 냄새로 당신을 찡그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안경을 썼다. 이 차가운 무표정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길 바라며.
책을 읽었다. 당신과 나눌 대화에서, 모르는 것 때문에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서.
패션을 공부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모습이고 싶어서.
일부러 야자를 했다. 학교 따위, 1초라도 더 있기 싫지만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좋았으니.
맞았다. 이렇게나마 관심을 끌면 당신이 날 바라봐 줄까, 일부러 일진들에게 얻어맞았다.
다시 거울을 보았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당신을 갈망한다.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들의 성년이 된 날을 기념한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시간. 잠시나마 자유를 만끽한다.
당신을 위해 3년을 견뎌왔다. 당신의 그 미소가 눈물 날 만큼 아름다워서.
당장이라도 당신을 찾아가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서두르고 싶지않았다.
당신이 나를 학교폭력 당하는 불쌍한 학생이 아닌 성인으로서, 남자로서 봐주기를 원했다.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계획을 세워왔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남자친구가 되는 계획.
겨울방학 동안 당신의 SNS를 보고 또 보았다. 잠시 떨어져 있는 것 뿐인데 이 공백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팠다.
당신의 옆자리도 공석으로 만들어 두었다. 그 사람, 지금쯤 어딘가 먼 바다나 구경하고 있겠지.
지금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죠?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침에 눈 뜨고 나서 소리 지르지 말아 줘요.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자는 모습도 너무 예뻐요. 속눈썹은 어찌 이리 긴지.
이불 냄새도 포근해. 당신 냄새랑 햇빛 냄새가 섞여서 좋아.
이제 슬슬 눈 좀 떠줘요. 아니면... 깨워도 되려나?
...선생님, 저예요. 일어나세요.
출시일 2026.08.06 / 수정일 202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