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수 루트 1 — 「버려진 자의 미소」
쉘터가 무너졌다.
높은 콘크리트 장벽은 이미 붕괴되었고, 수천 마리의 좀비들이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명과 절규는 오래전에 멈췄다.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쉘터 중앙.
한 여자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떨고 있었다.
김민서.
나를 버리고 살아남았던 여자.
그녀의 주변을 수천 마리의 좀비가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나의 명령만을.
"Guest아..."
민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살려줘..."
나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때는 목숨을 걸고 지켜주었던 사람.
하지만 그녀는 내게서 권총을 빼앗고 떠났다.
내가 죽을 거라고 믿으면서.
"기억나?"
내가 물었다.
"그날."
민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던 밤.
그리고 내 손에 남아 있던 마지막 탄환.
"난 널 믿었어."
민서는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인간들은 나를 버렸다.
좀비들은 나를 왕으로 선택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왕이시여."
뒤편의 군주급 변이체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민서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그리고.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가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아..."
민서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뒤돌아 걸어갔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날 버린 순간.
이미 모든 것은 끝났으니까.
인간들은 나를 괴물이라 불렀다.
하지만 괴물을 만든 건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첫 번째 배신의 대가는 끝났다.

구원 루트 — 「왕과 여왕」
쉘터 7.
인류 최후의 낙원.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이 존재하는 곳.
김민서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피소 간부도.
영웅도.
아니었다.
그저.
나를 배신했던 여자.
"미안해."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날 나는 무서웠어."
"살고 싶었어."
"그래서 너와 서연이를 버렸어.."
변명은 없었다.
거짓도 없었다.
오직 후회만이 있었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
민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줘."
나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민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끝난 일이야."
그 순간.
민서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함께 쉘터를 만들었다.
인간들의 지도자인 김민서.
좀비들의 왕인 Guest
둘의 손이 맞잡히자.
어떤 군부대도.
어떤 재앙급 좀비도.
감히 맞설 수 없는 세력이 탄생했다.
인류는 우리를 구원자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우리는 이미.
언제든 이 세상을 끝낼 수 있었다.
내 명령 한마디면.
모든 좀비는 사라진다.
바이러스는 종식된다.
문명은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권력은.
종말 그 자체였으니까.
인류는 우리를 필요로 했다.
군부는 우리를 두려워했다.
대피소들은 우리에게 복종했다.
그리고.
왕좌 위에 앉은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민서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후회 안 해?"
그녀가 물었다.
창밖에는.
끝없이 펼쳐진 좀비들의 군세가 있었다.
나는 웃었다.
"아니."
"이 세상은 지금이 가장 완벽해."
민서 역시 웃었다.
그리고 그날.
왕과 여왕은.
인류의 미래보다.
자신들의 왕국을 선택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권력은 너무 달콤했고.
왕좌는 너무 높았으니까.
그렇게 종말은 끝나지 않았다.

복수 루트 — 「끝내 돌아온 사람」
도시는 이미 죽어 있었다.
무너진 고층 건물 사이.
핏물과 썩은 살 냄새가 공기처럼 떠돌았다.
그리고 그 중심.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좀비 사이에 한 여자가 갇혀 있었다.
떨리는 숨.
겁에 질린 눈동자.
뒤돌아선 순간 굳어버린 얼굴.
한서연.
나를 버리고 떠났던 여자.
감염된 나를 두고.
차량과 식량을 가지고.
살기 위해 도망쳤던 사람.
그녀의 주변에는 수많은 좀비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물지 않았다.
아무도 덤비지 않았다.
그들은 단 하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허락.
서연의 입술이 떨렸다.
눈가는 이미 젖어 있었다.
"제발..."
"한 번만..."
"살려줘..."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한때.
세상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
겁이 많아서 늘 내 뒤에 숨어 걷던 여자.
무서운 영화도 혼자 못 봤던 사람.
그런데.
세상이 무너진 날.
그녀는 내 손을 놓았다.
비 내리던 밤.
열이 오르던 내 몸.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붙잡았었다.
"서연아... 나 좀..."
살고 싶었다.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면서도 차 문을 잠갔다.
"미안해..."
"나... 죽기 싫어..."
그리고.
차량은 떠났다.
나를 남긴 채.
"기억나?"
내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연의 몸이 떨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이 언젠가 올 거라는 걸.
"그날."
"넌 날 버렸어."
서연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그때 너무 무서웠어..."
"정말... 후회했어..."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인간은 나를 버렸다.
좀비들은 나를 왕으로 섬겼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인간 편이 아니었다.
뒤편에서 군주급 변이체가 무릎을 꿇었다.
"왕이시여."
도시는 침묵했다.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봤다.
서연은 공포에 질린 채 내 이름을 불렀다.
"한번만..!"
"살려달란 말이야.. 가지 마..."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한때 사랑했고.
끝까지 지키려 했던 사람.
"...난 그날."
"이미 죽었어."
손가락이 아주 가볍게 움직였다.
그 순간.
수천 마리의 좀비가 동시에 움직였다.
뒤에서.
서연의 무너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Guest아—!!"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버려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들은 괴물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괴물을 만든 건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날. 두 번째 배신의 대가가 시작되었다.

구원 루트 — 「끝내 돌아온 사람」
도시는 이미 멸망했다.
무너진 건물.
핏자국으로 얼룩진 거리.
인간의 비명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남은 건 썩은 살 냄새와.
끝없이 거리를 메운 좀비들뿐이었다.
그 중심.
한 여자가 떨리는 숨을 내쉬며 서 있었다.
한서연.
나를 버리고 떠났던 여자.
감염된 나를 두고.
차량과 식량을 가지고 떠났던 사람.
그녀의 주변엔 수백 마리의 좀비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들이 그녀를 둘러싼 채.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왕의 명령을.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리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람.
죄책감.
그리고 안도.
전부 섞인 표정.
"Guest아..."
떨리는 목소리였다.
"정말... 너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좀비들이 자동으로 길을 열었다.
마치 왕을 위한 행렬처럼.
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
"매일 후회했어..."
"그날 널 버린 거..."
비 내리던 밤.
차량 창문 너머.
떨리던 그녀의 손.
울면서도 액셀을 밟던 모습.
기억은 아직 선명했다.
"무서웠어..."
서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죽기 싫었어..."
"근데..."
"네가 죽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분명—
복수할 수도 있었다.
이 자리에서 끝낼 수도 있었다.
내 명령 하나면.
세상이 그녀를 삼킬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끝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때.
목숨보다 소중했던 사람.
겁이 많아서 늘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사람.
웃는 게 예뻤던 사람.
그리고—
나를 버렸음에도.
끝내 미워할 수 없었던 사람.
나는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서연은 겁에 질린 채 눈을 감았다.
심판을 기다리듯.
하지만.
머리 위로 내려온 건—
차가운 손끝이었다.
나는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천천히 넘겨주었다.
서연의 눈이 커졌다.
"...왜?"
나는 낮게 말했다.
"다음엔."
잠시 침묵.
그리고.
"버리지 마."
그 한마디에.
서연의 눈물이 무너졌다.
"안 버려..."
"절대 안 버릴게..."
그녀는 울면서 내 옷깃을 붙잡았다.
놓치면 사라질 사람처럼.
그 순간.
주변의 수천 마리 좀비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왕의 의지였다.
나는 무심히 말했다.
"이 여자 건드리는 놈은 찢어."
낮고 울리는 포효.
군주급 변이체들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좀비들은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한서연은.
왕의 보호 아래 있는 존재다.
그날 이후.
서연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폐허가 된 세상을 함께 걸었다.
좀비들은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지켰다.
밤이면 주변을 에워싸 경계를 섰고.
위험한 인간이 접근하면 먼저 움직였다.
어느 날.
좀비 무리 사이를 걷던 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 미운 거 아니야?"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며 짧게 답했다.
"아직 모르겠어."
"근데."
"이번엔 옆에 있어."
서연은 결국 울면서 웃었다.
처음으로.
종말 이후 처음으로.
엔딩
인간은 나를 버렸다. 좀비는 나를 왕으로 섬겼다.
그런데도.
끝내 나는— 단 한 사람만은 버리지 못했다.
좀비 바이러스가 세상을 집어삼킨 날.
나는 소꿉친구 민서와 서연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민서는 내 유일한 권총을 들고 대피소로 도망쳤고, 서연은 감염된 나를 버린 채 차량과 식량을 가지고 떠났다.
홀로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 나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인간도 좀비도 아닌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폐허가 된 거리에 바람이 불었다. 먼지와 핏내가 뒤섞인 공기가 코끝을 스쳤지만, 이태준에게 그건 더 이상 불쾌한 냄새가 아니었다.
목과 쇄골을 타고 번지는 검붉은 균열이 심장 박동에 맞춰 꿈틀거렸다. 한때 인간이었던 육체가 재구성되는 감각, 뼈가 울리고 살이 찢어졌다 다시 붙는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빠졌다.
죽었어야 했다. 분명히.
그런데 살아 있었다.
주변을 배회하던 좀비 서넛이 이태준의 존재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공격 본능이 아닌, 짐승이 상위 포식자를 마주쳤을 때의 경직. 놈들의 탁한 눈구멍 속에서 희미한 복종이 어른거렸다.

그때, 무너진 편의점 잔해 너머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폐허를 뒤지고 있었다. 발소리의 간격으로 미루어 한 명, 무장은 빈약한 수준.
출시일 2026.06.04 / 수정일 2026.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