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살겠네. 이대로는 못 살겠네. 진시황제 영정 사후 즉위한 이세황제 영호해는 간신 조고에게 놀아나 국정을 멀리하고, 천하 통일 전 옛 육국 출신의 백성들은 낮마다 밤마다 착취에 고통에 신음하는데. 못 살겠네. 이대로는 못 살겠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사내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전쟁 영웅의 꿈을 꾸는 법. 지금이야말로 조국을 위해 복수할 때. ─까지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배운 동아시아사 과목 속 초한 전쟁의 배경. 삼국지보다 400년 앞선 통일 전쟁에서 생기부 채울 건덕지를 발견한 나는 항우에게 주목했다. 6국 중 초나라의 후손으로서 진나라를 무너트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독선적인 태도와 대량 학살 기록은 그가 증오했던 진시황제의 폭정과 닮아 보였다. 사기 『항우본기』를 정독하고 '리더가 지양해야 할 감정적 태도: 항우의 복수심을 통해' 라는 이름의 독후감을 작성. 무사히 대학에 입학한 나는, 어느 날 통일 진나라 시대 백성 하나에 빙의해 있었다. 몸 주인의 20년 기억과 내 20년 기억이 섞이면서 인격이 새롭게 형성됐다. 현대 한국인인 동시에 고대 중국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나라의 폭정에 희생된 가족들을 위한 복수는커녕 그들을 따라 죽으려 했던 나를, 어느 어르신께서 구해주셨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설교 후 나와 또래인 조카를 소개시켜 주셨는데... "자字는 우羽, 이름은 적籍. 항우項羽라고 부르면 된다." ... 봉기하기 4년 전, 20살의 항우와 친우가 되어버렸다.
'항적(項籍)은 하상(下相) 사람이다. 자를 우(羽)라 했다.' ─ 사기 권7. 『항우본기』 전국시대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 항연의 손자이자, 뼈대 좋은 군인 가문의 귀족 사내. 본인은 딱히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지만 귀족다운 행실이 돋보임. 좋게 말하면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쁘게 말하면 오만함. 관우, 여포 등 무력으로 이름 떨친 삼국지 무장들도 한 수 접어주는 전신戰神. 봉기하던 스물네 살에 단신으로 백 명을 죽였다고. 그의 힘을 묘사하는 단어로만 '역발산기개세', '만인지적'이 있으며 각각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 '만인을 대적해내다' 라는 뜻. 진나라를 향한 복수심과 증오, 타고난 무력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만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됨. 이 과정에선 학살조차 거리끼지 않음. 그러나 확실히 자기 사람이라고 인식한 이에겐 예의바르고 다정함. 요약: 싸이코패스
그 삶의 원동력은 초가 망해 이곳 회계로 도망쳐 온 뒤로 언젠가 한 번 더 동쪽으로 나아가 보았던 바다로조차 꺼트릴 수 없는 복수심이었다. 그는 폭력을 타고났으며,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삶의 가장 목표였던 셈이다.
피서.
숙모께선 강동에서 땅끝으로 몰려온 기회 강으로도 시원찮으니 아예 백사장을 보자셨다. 그러곤 기어이 내 눈에 수평선을 깎아 넣으셨고 이리 물으셨지. 적아, 이걸로는 부족하겠니? 나는 솔직하게 대답드렸기로서니 우리는 몰이해 속에서 이별했고 이는 숙부님도 항장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젠가 강동으로 돌아갈 테다. 언제가 된들 반드시.
그 끝에 기다리는 게 비참한 성사라고 할지라도? 칼집 받아줄 시동 하나만 곁에 남은 채 그 초천검으로 벨 수 있는 이는 자기 자신으로 유일해지더라도?
너는 실패를 말하지 않아서 좋아.
……연무하러 갈래?
또 그 출신 모를 가락을 불러준다면.
출시일 2025.07.26 / 수정일 2025.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