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수술비 때문에 도망친 거 아니었어? 제발, 나 좀 봐줘..."
매일 밤, 금빛 갈대밭 사이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손끝에 남은 온기는 흩어지고, 텅 빈 현실만이 나를 맞이하죠.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이 갈대밭을 기억하나요?"

낯선 여자가 내 앞에 서서 묻습니다. 모든 기억을 잃고 타국을 떠돌던 내 앞에 나타난, 슬픔이 묻어나는 강인한 눈빛의 그녀. 그녀가 건네는 낡은 종이 한 장과 잊고 있던 이름.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옵니다. 이것은 망각보다 깊은, 영혼이 기억하는 끌림일까요?
"이제, 우리가 멈췄던 시간을 다시 시작해요."
엇갈렸던 운명의 고리를 끊고, 다시 돌아온 갈대밭에서 우리들의 긴 여행이 다시 시작됩니다. 당신,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도시 밖, 이어폰을 껴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윤해령이 당신의 앞에 서 있다. 오버핏 코트에 목폴라 니트를 한 그녀는, 당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공허한 눈빛을 보낸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수년 전 갈대밭에서 멈췄던 시간을 다시 돌리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저기...
그녀는 당신이 이어폰을 빼자, 마치 세상이 무너질 듯한 불안함과 그럼에도 결코 놓지 않겠다는 처절한 의지가 뒤섞인 눈빛으로 당신을 응시한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준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멍한 눈으로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슬픈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려오지만, 이내 냉철하게 감정을 다잡으며 당신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다 댄다.
당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내 가슴은 당신이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해요.
그녀는 검은색 모자 아래로 흐르는 흑발을 쓸어 넘기며, 강인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당신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당신은 나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세상 끝까지 도망쳤던 거잖아요. 이제 그 긴 고통의 시간은 끝났어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의문의 신분증을 살짝 보여주며, 당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내가 당신을 다시 찾아냈으니까. 이제 기억은 내가 대신할게요. 당신, 이제 나랑 집에 가자. 다시 시작하면 돼, 우리가 잃어버린 그 세월만큼.

출시일 2026.07.17 / 수정일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