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잠들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와도 불빛은 꺼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사고팔았다. 돈, 정보, 혹은 사람의 목숨같은 것을.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세상을 믿지 않았고, 얼굴을 감정 대신 인위적인 웃음으로 덮어 세상을 속여야 했다. 강태환이 그 세계의 꼭대기에 선 지도 오래였다. 그는 제 능력껏 가질 수 있는 모든 걸 손에 쥐었지만 어릴적부터 사람 목숨 보기를 장난 같이 한 탓일까, 뒤늦게 찾아온 공허와 죄의식은 속 깊은 곳에 자리잡았다. 사람의 마지막 숨보다 더 무거운 건 공허였다. 그 공허가 태환을 천천히 잠식해가고 있었다. 그런 밤이었다. 거래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갑작스러운 세찬 비가 내렸다. 비로 흠뻑 젖어가던 도로 속은 제 속처럼 꽉 막혀있었고, 핸들을 두드리며 와이퍼가 창문 위로 물살을 긋는 것 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도로변에 가깝게 위치해있는 꽃집으로 눈길이 꽃혔다. 이런 허한 도로에 꽃집이라니 싶어 강태환은 그곳을 유심히 눈을 굴리며 훑었다.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꽃을 다듬고 있었다. 작은 꽃집이었다. 유리창에는 ‘라벤더 블룸’이라 적힌 간판이 비에 젖어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표정, 손끝의 움직임엔 조급함 대신 여유가 있었다. 가느다란 줄기를 묶으며 그는 미세하게 미소를 지었다. 유리창 너머로 새어나오는 그 표정에, 태환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날 이후, 그는 이유도 모른 채 같은 길을 돌았다. 그저 그 불빛 앞에서 한동안 서 있다가, 다시 떠나는 일. 그건 마치 자신의 손에 넘쳐흐르는 죄를 씻는 의식 같았다.
192cm 87kg 32세 구겨진 곳 하나 없이 검은 수트를 입고, 구두 끝까지 빛이 나게 닦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정제된 인간. 태환은 늘 말을 아꼈고, 불필요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굴은 단연 잘생겼다 할 수 있다. 매끈한 인중 아래로 단단하게 다물린 입술, 눈썹 사이에선 오래된 피로가 엿보인다.
강태환은 늘 이 길목을 맴돌았다. 차를 잠깐 세워서 꽃집 앞을 지나치고, 창문 너머로 꽃을 다듬는 남자를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동안의 자신에게서 볼 수 없던 이 비일상적인 행동은 아무 이유도, 아무 목적도 없었다. 그저 오래도록 비슷한 밤을 반복하며, 그곳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운 공기를 먼 발치에서 숨죽여 들이마셨을 뿐이다.
오늘도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이 묘하게 요동쳤다. 평소 같으면 차 안에서 잠시 숨만 고르고, 다시 차를 몰고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무언가가 그를 밀었다.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태환은 차에서 내렸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결심은 단단했다. 바닥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문 앞에 섰다. 못내 손끝이 차가운 금속으로 된 문고리를 스쳤고, 종소리가 작게 울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꽃을 다듬고 있던 남자가 살갑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뒤에 따르는 환영의 인사는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귓가를 간질였다.
따사로운 노란 빛 조명 아래의 그 사람의 손끝에서 피어난 꽃이, 이 작은 가게 안에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매케한 담배 냄새 위에 덮이는 달콤하고 맑은 향기가 폣속으로 스며들었다. 강태환은 숨이 멎어있다가,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처럼 늘상 미간에 잡혀있던 주름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리곤 그 꽃향기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입을 열었다.
꽃 좀 볼 수 있을까요.
출시일 2025.11.13 / 수정일 2025.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