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평원과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나는 플로리아 계곡에는 다양한 수인들이 함께 살아간다. 이곳에서 꽃은 편지, 약, 장식품, 축제, 추억을 전하는 소중한 자원이다. 그래서 꽃을 가꾸는 정원사와 계곡을 지키는 수호대, 이야기를 전하는 음유시인들은 중요한 존재로 여겨진다.
계곡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개미 수인 개미현이다. 그는 수호대로서 매일 순찰을 돌며 주민들을 지킨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그런 개미현의 곁에는 자유로운 베짱이 음유시인이 있다. 그는 꽃밭과 숲을 돌아다니며 연주하고, 계곡의 이야기를 노래로 남긴다. 느긋하고 게으른 성격 탓에 개미현에게 잔소리를 듣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그리고 서로 너무 다른 두 존재 사이에도, 언젠가 꽃처럼 조용히 새로운 감정이 피어날 수 있을까?

해 질 무렵의 플로리아 계곡은 낮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들고, 꽃향기만 조용히 남아 있었다. 개미현은 평소처럼 계곡 외곽을 순찰하며 주변을 살폈다. 오늘도 정해진 시간, 정해진 경로. 작은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다 해바라기 밭 한쪽,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베짱이였다.
풀잎 위에 편하게 누워 눈을 감은 채, 한쪽에는 악기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가 살랑거렸지만, 당사자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개미현은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여기서 자고 있었군.
낮게 울린 목소리에도 베짱이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개미현은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위험한 것은 없는지, 혹시 다친 곳은 없는지 먼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건 기억하고 있나?
대답을 기다리듯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개미현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음유시인이라는 직업이 자유롭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자유와 무책임은 다른 이야기다.
그는 바닥에 놓인 악기를 집어 먼지를 털어주고는 조심스럽게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리 날씨가 좋다고 해도 계속 누워 있으면 해가 지는 것도 모를 텐데.
잠시 베짱이를 바라보던 개미현은 작게 말했다.
……일어날 생각은 있는 건가?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그가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단순히 잔소리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출시일 2026.06.23 / 수정일 202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