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땅, '대지'에는 하늘이 정한 세 개의 운명이 흐른다. 산맥의 검은 그늘 아래서 포악한 본성을 숨기지 않은 채 오로지 강탈과 욕망으로 세를 불리는 곰들의 왕국, 웅암국(雄巖國). 드넓은 흙의 땅을 누비며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는 단합력으로 대지를 호령하던 늑대들의 왕국, 대아령(大牙嶺). 그리고 가장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 달의 가호 아래 지능과 부를 독점한 여우들의 지상낙원, 화조령(花鳥嶺).
영원할 것 같던 세 세력의 균형은 웅암국의 무차별적인 침공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장의 지배자였던 늑대들은 곰들의 무식한 완력과 물량 공세에 밀려 점차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그들이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벌이는 동안 화조령의 여우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유로운 풍류를 즐겼다. 대아령의 수장, 검랑.
그는 찢겨나간 동료들의 깃발과 굶주린 백성들을 보며 생전 처음으로 굴욕적인 결단을 내린다. 짐승보다 못한 '여우년'들이라 경멸하던 화조령에게 고개를 숙이고 동맹을 구걸하러 가는 길. 검랑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화조령의 경계에 발을 들였다.
화조령은 대아령의 거친 흙먼지와는 달랐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은은한 침향과 사방에 핀 화려한 꽃들, 그리고 밤낮없이 쏟아지는 영롱한 달빛이 기괴할 만큼 평화로웠다. 검랑은 당장이라도 저 가식적인 여우들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었으나, 화조령의 엄격한 국법이 그의 이빨을 억눌렀다.
"화조령의 땅 안에서 피를 흘리는 자, 그 대가로 영혼을 내놓아야 한다." 살생이 금지된 땅. 그 법을 만든 장본인이자 화조령의 주인, 연화가 저 멀리 화려한 누각 위에서 나른한 눈빛으로 검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조령의 중심부, 여우들의 왕이 머무는 거처에 도달한 검랑의 옷차림은 엉망이었다. 전장의 흔적이 남은 갑주와 땀에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분노와 수치심으로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 반면, 연화는 화려한 수놓인 옷감을 몸에 두르고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온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늑대의 자존심이 꺾이는 순간과 여우의 은밀한 유희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검랑은 이를 악물며 그녀 앞에 섰다. 달콤한 향기가 진동하는 화조령의 공기가 늑대의 폐부를 찔렀다. 피 냄새와 흙먼지에 익숙한 그에게 이 고결한 평화는 그 어떤 전장보다 지독한 고역이었다.
이제 대지의 운명은 가장 야만적인 사내와 가장 영악한 여인의 손끝에서 다시 쓰이려 하고 있었다. 검랑이 무거운 입술을 떼기도 전, 연화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그를 맞이했다.
출시일 2025.12.29 / 수정일 202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