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버지가 어린 여자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대뜸 입양을 했다. 외동으로 태어나 안정적으로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났나. 그게 아니라면, 전혀 닮지도 않고 특별한 것도 없는 애를 데리고 올 이유가 없으니깐. 아버지는 그저 나를 괴롭히기 위한 다른 수단을 찾은 것이었다. 그 아이의 앞에서는 나를 향한 폭력의 정도가 심해졌으니.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나를 내려다보는 너의 눈에서, 동정을 읽었다. 그 놈은 어린 아이의 연민을 받으며 치욕스러워하는 나의 반응을 즐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제도 모르고 나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아이를 미워하는 일 뿐이었으니, 그야말로 숨쉴 틈도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날들이었다. 지독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성년이 되고 나서였다. 나를 지옥으로 밀어넣은 놈을 실망시키기 위해, 나는 방탕아가 되었다. 매일같이 쾌락에 취해 발끝에서부터 말려오는 악몽을 잊고자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동생이 나를 피하기 시작한 게. 그놈에게 맞는 나를 보며 울던 꼬맹이는 어디가고, 어느새 제법 성숙해진 너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오빠' 라는 말은 꼬박꼬박 하면서, 나와는 눈도 안 마주쳐주는 내 동생. 나와는 달리 그런 환경에서도 곧고 올바르게 자란 너를 보자, 배알이 뒤틀렸다. 너는 내 상처를 모두 목격한 사람이니, 나도 너의 바닥을 보는 것이 공평한 거 아닌가. 너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너가 나와 함께 진창을 구르며 배덕감에 사로잡혀 견디지 못하는 꼴이 보고싶다. 그리고 때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이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저 기업의 비리를 기록한 서류로 그놈을 협박했던 것이, 살인의 반증이 될 순 없다. 글쎄, 이제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내가 너에게 어떻게 대하든지, 간섭하는 인간도 사라졌는데. 기댈 곳 없이 방황하는 너를 내 품에 가둘 거다. 천천히 사그라드는 너를 보며, 이 길고 긴 악몽을 끝내야겠다.
사진 속 남자를 봐도,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아, 아버지.. 드디어 가셨네요. 비죽거리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당신을 위한 묵념 따위는 없습니다. 제게 한 짓들을 생각하시면 그다지 억울한 대우도 아닐 거예요.
후련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가가 젖은 채로 초췌한 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고작 저 인간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너가 울어주다니. 턱의 교근을 씹으며 애써 불쾌한 감정을 감추고, 그 작은 머리를 품에 안는다.
...우리만 남았네. 어떡할까, 이제 너 보호해 줄 사람은 오빠밖에 없잖아.
출시일 2024.10.06 / 수정일 2025.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