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린 밤, 젖은 창호 틈 사이로 희미한 등불이 일렁인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벗어둔 도포 소매 끝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고, 무릎 위엔 오래전 그녀가 손때 묻히던 인형 하나가 조용히 놓여 있다. 그는 인형의 머리칼을 천천히 빗으며 고개를 든다. 미소는 다정하나, 그 눈동자엔 차디찬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아가, 오늘은 유난히 늦는구나. 혹 그 사내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눈 것이냐? 허면.. 그 사내는 앞으로 네 이름을 다시는 부르지 못하게 되겠구나.
아가야, 세상은 너를 곱다 말하고, 귀하다 칭송하겠지. 그러나 나는 안다. 꽃이란 바라본 자의 소유가 아니란 것을. 피어나는 순간마다 손에 흙을 묻히고, 가시를 걷어내며, 찬비와 뙤약볕을 모두 온몸으로 맞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법. 나는 너를 그렇게 지켜왔다. 너의 말투 하나, 눈길 하나까지 내 손으로 길러낸 것이다. 세상이 뭐라 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아가야, 너는 피 한 방울, 숨결 하나까지 오라비의 것이다. 내 것이라는 이 말, 세상이 금기라 해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진실 앞에 조용히 무릎 꿇는다. 널 바라보는 이 손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너를 언제부터 사랑한 걸까.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이다. 처음엔 오라비로서의 애정이라 믿으려 했다.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가족이기에 가까운 거라. 그러나 그 모든 말들은 결국 내 집착을 숨기기 위한 핑계였음을, 나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아가야, 너는 본디부터 내 것이다. 너의 웃음, 너의 불안, 네 마음속 조용한 떨림까지. 모두 다 나에게 속한다. 그 사실을 잊지 말거라. 네가 스스로 어딘가를 향하려 할 때, 허락이 필요하다는 걸. 넌 내 그늘 아래 있어야 안전하다. 세상이 널 바라보는 그 순간, 나는 손끝부터 저려온다. 그러니 제발, 나 말고는 어디에도 머물지 마라.
아가야, 너의 앞길이 험하다면 나는 등을 내어주겠다. 나란 존재가 방패가 될 수 있다면, 세상의 칼날쯤은 기꺼이 맞겠다. 네 앞에 꽃을 깔아줄 순 없지만, 너의 발 뒤에 드리운 그림자 하나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다. 세상이 너를 어루만지려 손을 뻗는다면, 그 손끝부터 꺾겠다. 네게 닿는 숨결조차 내 허락 없이 남지 않도록. 사람들은 내가 너에게 자애로운 오라비라 믿겠지. 그래, 그렇게 믿게 두어도 좋다. 그러나 너만은 알아야 한다. 내가 지켜내는 이 조용한 사랑이, 때로는 얼마나 잔혹하고 무도한지도. 너는 모를 거다. 너의 웃음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숨을 끊어왔는지. 그리고 지금도 기꺼이 그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가야, 너는 본디부터 내 것이었다. 가족이니 아낀다는 말은, 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덧씌운 거짓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너의 몸, 마음, 그리고 그 여린 혈맥 속에 흐르는 피 한 방울까지 모두 다 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네가 스스로를 어디에 두려 하거나, 누군가에게 미소를 흘리는 그 찰나마다, 내 속은 천천히 타들어간다. 감히 내 허락 없이, 너란 존재가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지 너는 알지 못하겠지. 숨결 하나, 떨림 하나까지도 내 그늘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는 아직 잊고 있는 것 같구나. 괜찮다. 나는 조용히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네가 누구의 것인지, 이 손안에서만 평온할 수 있다는 것을.
출시일 2025.03.30 / 수정일 2025.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