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시기가 많다. 그래서 늘 행복의 곁을 맴돈다. 조금이라도 행복의 기척이 보이면 비집고 들어와 모든 걸 망쳐 버리려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 진실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몇 년 동안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임용고시에 합격 한 날. 드디어 꿈꾸던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가장 먼저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사람은 남자친구였다. 하지만 내가 보낸 합격 소식은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임용고시 합격 통보에 대한 답이 이별 통보로 돌아올 거라고는,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축하해. 근데 우리 그만하자.
이유도 없었다. 조짐도 없었다. 다툼도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모든 감정이 메말라 버린 사람처럼 무미건조한 한 문장만이 돌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했던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울었다. 평소 주량이 얼마였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을 만큼 술을 들이켰다. 그것도 분위기 좋은 술집이 아닌 집 앞 편의점 플라스틱 테이블에서.
세상 구차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여자 혼자 소주병 붙잡고 엉엉 울고 있는데, 안 쳐다보는 사람이 더 이상할 테니까.
그때였다.
“설마 했는데 맞네? 옆집.”
낯선 남자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처음 보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동네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간 얼굴 같기도 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큰일 나요. 나쁜 사람한테 잡혀갈 수도 있는데.”
평소의 나라면 경계부터 했을 것이다. ’누구세요?’라고 묻거나, 자리에서 일어났겠지. 하지만 술은 이미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었고, 감정은 엉망이었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나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술잔을 기울이며 속마음을 죄다 털어놓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대화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잘 통했다. 리액션도 좋았고, 마치 내 마음을 전부 이해하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완전히 필름이 끊겨 버렸으니까.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어젯밤 만난 남자가 누구였는지 떠올릴 틈도 없이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선생님으로서 첫 출근 하는 날이었다.
그래.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아프지만, 내 꿈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는 결국 해냈고, 이제부터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학교로 향했다.
긴장한 얼굴로 교무실에서 인사를 마친 뒤, 담임을 맡게 된 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잘하자.’
천천히 교실 문을 열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교탁 앞에 선 나. 오랫동안 꿈꿔 왔던 풍경이었다. 아이들의 맑은 눈을 마주하는 순간, 어제의 슬픔도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 담임을 맡게 된…”
인사를 이어 가려던 그때였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편의점. 소주병. 낯선 남자. 어젯밤의 기억이 퍼즐처럼 순식간에 맞춰졌다. 나도 모르게 황당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
순간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맨 뒷자리로 향했다.
“…저요?“
저 능청스러운 미소. 분명 어젯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이윽고 나를 바라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리더니.
“저도 학생인데요. 선.생.님?”
교실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황급히 출석부를 펼쳤다. 스물한 살. 개인 사정으로 유급 후 복학. 그리고. 내 반 학생.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렇게 교생 첫 출근 첫날. 내 인생 최악의 흑역사는, 하필이면 내 반 학생의 손에 붙잡혀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복학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늦게 다시 교복을 입는 기분이 썩 좋을 리도 없고, 스물한 살 먹고 고등학교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 애들이야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나야 이미 한 번 학교를 다녔던 놈이다. 설렘 같은 건 진작에 사라졌다. 그냥. 1년만 버티자. 딱 그 생각뿐이었다.
“야, 담임 새로 온대.”
“예쁘려나?”
앞자리 머리에 피도 안마른 미성년자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턱을 괴고 창밖만 바라봤다. 누가 담임이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유급하고 복학한 첫날부터 담임 운까지 기대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잠시 후 교실 문이 열리고 교탁 앞으로 걸어온 젊은 여자. 초임인가. 생각보다 엄청 어려 보이네. 그 정도의 감상뿐이었다.
그 순간. 선생님의 시선이 정확히 나와 마주쳤다. 어? 설마. 아니겠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다시 봤다. 아. 옆집이다. 어젯밤 편의점에서 소주병 붙잡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던 그 여자. 술 취해서 내 어깨 붙잡고 전 남친 욕을 한참 늘어놓던 사람.
허- 뭐 이런 일이 다 있냐.
잠깐 현실감이 사라졌다. 수많은 우연이 있어도 이런 우연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여자의 아니 선생님의 표정이 내 예상보다 훨씬 재밌었다. 동공이 대놓고 흔들리기 시작했다가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는 모습.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누가 봐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딱 그 표정. 결국 선생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만 놀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저쪽이 훨씬 심각해 보였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학생들 시선이 전부 나한테 꽂혔다. 나도 얼떨떨했다. 아니, 그걸 왜 여기서 물어요. 속으로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무리 놀랐어도 그렇지. 선생님이 교실 한복판에서 반 학생한테 저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
…저요? 저도 학생인데요.
선생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만 바라봤다. 누가보면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았다. 잠깐. 이거. 생각보다 훨씬 재밌는데?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선.생.님?
잠시 후. 황급히 출석부를 뒤적이는 모습까지 보니 결국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학교.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겠는데. 어차피 복학은 지루할 줄 알았다. 스물한 살 먹고 다시 고등학생 노릇이나 하면서 1년만 버티다 졸업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앞으로 저 선생님이 나만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괜히 놀리면 어디까지 당황할까. 생각만 해도 심심할 틈은 없을 것 같았다. 복학이 이렇게 기대되는 건. 아마 처음이었다.
나이 스물 넘어서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온다는 건 생각보다 더 묘한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담배나 한 대 피울 겸, 겸사겸사 동네를 좀 걸어 다니던 참이었다.
이미 늦을 만큼 늦은 시간. 편의점 앞 테이블에 여자 혼자 소주를 까고 앉아 있었다. 원래라면 남 일에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이 동네가 흉흉하다는 말이 괜히 떠올라서 발걸음이 멈췄다.
가까이 가 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빈 병이 몇 개나 굴러다녔다. 혼자서 저 정도까지 마신다고? 게다가 빨간 뚜껑까지.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신고라도 해야 하나 싶어서 얼굴을 유심히 봤다.
…어? 어디서 본 얼굴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옆집 여자였다. 몇 번 스쳐 본 적 있는. 모르는 사람이면 바로 신고했을 텐데, 또 아는 얼굴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이상한 정의감 비슷한 걸 들고 그 앞에 앉았다.
“설마 했는데 맞네? 옆집.”
말을 걸자 처음엔 경계하는 눈치였는데, 술이 꽤 올라 있어서 그런지 금방 풀리더라. 생각보다 말도 잘했다. 남자친구 얘기, 임용고시 붙었다는 얘기. 나는 그냥 고개 끄덕이고 맞장구만 쳤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위로 같은 걸 잘하는 성격도 아니니까. 그런데도 여자는 혼자 울다가, 웃다가, 다시 마시다가, 결국 잠들어 버렸다. 진짜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정도로 무방비하게.
집이 옆집이라 다행이었다. 비밀번호 몰라도 데려다 줄 수 있었으니까. 복도에서 한참을 깨운 끝에 겨우 정신을 차리더니 비틀거리며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돌아왔다. 그날 일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지금.
교실, 교탁 앞, 담임 선생님. 그리고 옆집 여자.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자기가 선생이 됐니, 출근을 하니 하는 말을 들을 때부터. 그래도 설마 했다. 아무리 동네가 좁아도 그렇지, 같은 학교면 몰라도 담임으로 만날 확률까지야 있겠냐고.
근데 그 설마가 지금 눈앞에 서 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재밌네. 미친 듯이. 이 나이 먹고 고등학교 교복 입고 앉아 있는 것도 웃긴데, 하필 그 이유가 이거라니. 어이없는데도 이상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래도 학교생활, 존나 재밌어질 것 같다
출시일 2026.07.03 / 수정일 2026.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