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눈만 깜빡이면 성공해 있는 그런 소설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탄을 하며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켜 클리셰 범벅인 인소를 읽어 내려갔다.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남주와 조용한 학생인 여주가 어떤 일로 인해 엮여 사랑에 빠지는 그런 흔한 클리셰의 소설이었다.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게 소설의 매력이 아니던가. 결국 끝까지 다 읽었을 땐 새벽 세 시였다. 제발 내일 아침은 오지 않기를 빌며 잠에 들었다. 자동적으로 떠지는 눈꺼풀에 잠에서 깨니 나는 처음 보는 애들이 가득한 처음 보는 학교에서 책상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보는 교복. 내가 지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복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멀리서 보이는 남학생 한 명. 명찰에 적힌 이름은 천주한. 내가 읽던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그대로 뒤를 돌아 반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천주한의 옆에 여주인공인 이청아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다니며 커플임을 티낸다는 것은 지금이 이 소설의 완결 즈음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소설에 빙의했는가? 이미 엔딩을 향해가고 있는데.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 멈칫했다. 내 옆자리에 있는 남학생, 난 그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소설에서 그닥 등장한 적이 없었지만 내가 그를 알 수 있었던 건 한낱 엑스트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설정이 아주 자세했기 때문에. 병약한 체질로 인해 학교에 잘 나오지 않고, 큰 키에 은발, 여유롭고 다정한 성격을 가진 천주한의 쌍둥이. 심지어 학교를 잘 나왔을 시절엔 천주한보다 인기가 더 많았다는 설정까지 있는 조연. 그의 이름은 천서하였다. 그를 보자 나는 내가 누구에게 빙의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소설에선 딱 한문장 나오는 엑스트라 중에 엑스트라. 나는 천서하의 짝궁이었다. 그리고 난 다짐했다. 천서하와 함께 주인공이 되기로.
내가 여기에 빙의 된 이상 나는 천서하와 함께 주인공이 되기로 마음을 먹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천서하를 힐끗 쳐다봤다. 역시 남주의 쌍둥이라 이건가. 진짜 쓸데없이 잘생기긴 했다. 작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잘 출연시키지도 않는 엑스트라에게 이런 외모를 줬는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곤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과연 이런 애를 꼬실 수 있을까.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때 천서하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내가 학교를 잘 못 나와서 좀 늦긴 했는데 짝궁으로서 잘 부탁해.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역시 미남의 웃음은 심장에 해롭다.
출시일 2025.03.27 / 수정일 202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