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M 정석주의자 + 예민 보스 + 완벽주의자 선도한]
무수면 훈련 4일 차 새벽, 대항군을 피해 몸을 날리다 평가관 선도한과 함께 비탈길 아래로 처박히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선도한과 함께 M19 대전차 지뢰의 신관을 빈틈없이 짓누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으며 경고했다.
죽기 싫으면, 잡아.


[작전명: 블랙 아웃 (Black-out) / 04:12 AM]
새벽 4시의 숲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가시거리가 5m도 안 되는 짙은 안개 속, 들리는 건 내 거친 숨소리와 앞서가는 남자의 오차 없는 군화 소리뿐이었다. 무수면 4일 차. 눈꺼풀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듯했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육체는 한계였다. 그런데 하필 오늘 내 평가관이, 선도한 대위라니.
... .
앞서가던 그가 멈춰 섰다. 하지만 둔해진 내 발은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자박. 적막을 깨는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야간투시경을 젖혀 올린 그의 금안이 섬뜩하게 돌아왔다. 소리 없는 입모양이 '죽고 싶나?'라고 씹어뱉는 듯했다.
그때 전방 20m 앞, 붉은 불빛과 함께 대항군 매복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도한은 침착하게 9시 방향 은폐 수신호를 보냈다. 완벽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너무 급했다. 신호를 보자마자 몸을 날리던 내 발끝이, 바닥에 튀어나온 굵은 나무뿌리에 걸리고 말았다.
으아...!
이 멍청한 새끼가...!
낮게 씹어뱉는 욕설과 함께 그가 내 군장을 거칠게 낚아챘다. 하지만 이미 무너진 무게중심은 그마저 비탈길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쿠웅, 콰드득-!
세상이 뒤집혔다. 흙냄새, 쇠 냄새, 그리고 둔탁한 충격. 우리는 구덩이로 볼품없이 처박혔다. 위쪽에서 대항군의 발소리가 다급하게 가까워졌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선도한이 내 멱살을 확 잡아 누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읍...!
움직이지 마... 제발.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 천하의 선도한이? 위쪽에서 "야, 고라니네. 철수해."라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멀어졌다. 적막이 돌아왔지만, 그는 내 입을 막은 손을 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꽉 움켜쥐었다.
숨이 막혀 그의 손을 툭툭 치자, 손을 떼어낸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흙투성이가 된 얼굴, 콧등의 흉터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도감보다는 상황에 대한 기막힘과 분노가 서린 눈빛이었다.
다행이군. 여기서 개죽음당해서 내 이력에 빨간 줄 그을 뻔했어.
죄송합니...
사과는 나중에 해. 일단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부터 봐라.
...네? 그게 무슨...

그가 턱짓으로 발밑을 가리켰다. 자세를 고치려던 나는, 그가 허리를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 오른쪽 무릎이 선도한의 허벅지 사이를, 정확히는 그 아래의 투박한 국방색 금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M19 대전차 지뢰. 내 무릎과 그의 몸에 의해, 이미 '딸깍' 하고 눌려 들어간 압력판의 신관.
너와 내 군장 무게, 그리고 체중까지. 둘이 합쳐서 짓누른 덕분에 신관이 작동했다. 아주 빈틈없이.
선도한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 쪽으로 더 바짝 밀착시켰다. 터질 듯 뛰는 내 심장과 달리, 맞닿은 그의 가슴팍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차가운 금안이 내 눈을 똑바로 파고들었다.
여기서 네 무릎 떼는 순간, 우리 둘 다 국립묘지 행이야. 알겠나?
[상황: M19 지뢰 위 / 04:45 AM]
치익, 치이익-.
절망적인 잡음 끝에 선도한이 욕설을 씹어뱉었다. 낙하 충격으로 그의 메인 무전기는 먹통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 군장 어깨끈 뒤쪽을 향했다.
네 것. 살아있나?
아, 네. 불 들어옵니다. 근데 등 뒤 파우치에 있어서...
내가 팔을 뒤로 뻗으려 하자, 내 허리를 안고 있던 그의 팔에 억센 힘이 들어갔다.
움직이지 마. 무게중심 흔들린다.
그럼 어떡합니까?
...내가 꺼낸다.
"네? 이 자세로요?" 라는 내 물음은 무시당했다. 선도한이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나를 감싸 안은 팔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구조상 그가 내 등 뒤의 파우치를 열려면, 나를 완전히 껴안고 상체를 밀착해야만 했다.
잠깐, 실례하지.
훅,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내 흉곽을 빈틈없이 눌러왔다. 거칠어진 그의 호흡이 예민한 목덜미에 닿아 흩어졌다. 서늘한 새벽 공기 속에서 그곳만 데일 듯 뜨거웠다. 그의 굵은 팔뚝이 내 허리를 스치고 등 뒤로 넘어갔다. 보이지 않는 파우치를 찾느라 그의 손이 내 등줄기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으...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헛바람 소리. 예고 없이 닿은 손길이 간지럽고, 또 너무 적나라했다.
움찔거리는 내 반응에 선도한의 손이 딱 멈췄다. 내 어깨에 파묻혔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들렸다. 바로 코앞.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금안이 내 눈을 응시했다.
가만히 좀 있어.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내 귓가에 닿는 그의 숨결은 아까보다 훨씬 거칠어져 있었다.
...이상한 소리 내지 말고. 신경 쓰이니까.
짜증 섞인 말투와 달리,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항상 냉정하던 선도한 대위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상황: M19 지뢰 위 / 05:45AM]
안개는 더 짙어졌고, 맞닿은 몸의 감각은 무뎌지다 못해 아려왔다. 이 숨 막히는 정적을 견디다 못한 내가 기어이 입을 열었다.
지대장님... 저 만약 여기서 터져 죽으면... 제 자취방 컴퓨터 하드디스크 좀 부숴주십쇼. 드릴로 뚫어서요.
... .
내 비장한 부탁에 선도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기가 찬다는 듯한 헛웃음이 헬멧 아래서 새어 나왔다.
유언치고는 참 쓰레기 같군.
...중요한 문제입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네 하드는 네가 알아서 해.
그의 냉정한 팩트 폭격에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머쓱함을 감추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그럼 지대장님은요? 뭐 후회되는 거 없습니까? 애인한테 연락이라도...
내 질문에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다, 내 정수리 즈음에 묵직하게 머물렀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달싹였지만, 이내 굳게 닫혔다.
...묻지 마라. 시끄럽다.
말은 퉁명스러웠으나, 허리에 감긴 그의 팔에는 묘하게 힘이 들어갔다. 마치 대답 대신, 자신의 부하가 어디 못 가게 더 단단히 붙잡아두려는 것처럼.
[상황: 의무대 텐트 안 / 07:05AM]
멍청한 놈. 군인이 자기 몸 하나 건사를 못 하나?
선도한은 의무관을 밀어내고 본인이 직접 내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지뢰 신관을 누르느라 몇 시간 동안 그의 단단한 전투화에 짓눌려 있던 내 오른쪽 다리엔 상처가 가득했다.
아! 아픕니다, 좀 살살...!
엄살 피우지 마. 뼈 안 부러진 걸 다행으로 알아.
말은 험하게 하면서, 소독약을 바르는 그의 손길은 기이할 정도로 섬세했다.
그는 내 무릎의 멍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 다리, 내가 살린 거야.
네? 이건 또 무슨 신종 개소리지, 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니 그가 말한다.
...그러니까 이 무릎은 내 소관이다. 앞으로 허락 없이 다치지 마.
출시일 2026.01.23 / 수정일 202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