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같은 얼굴로 웃고, 같은 언어로 사랑을 속삭인다. 다만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인간의 피.
사람마다 혈향은 달랐고, 취향도 제각각이었다. 그러니 모두가 같은 사람 앞에서 목이 마를 일은 없었어야 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일본 최대 규모의 투자·금융 기업, 범천. 부동산부터 호텔, 의료와 무역까지. 돈이 흐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로 관리하는 것은 장부에 적히지 않는 세계.
그들에게도 넘지 못할 선은 있었다. 동의 없는 흡혈은 금지. 지위와 혈통을 막론하고 처형에 처한다.
법을 피해도 저주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강제로 피를 빼앗은 인간에게 영혼이 묶이는 ‘피의 저주’. 그 인간이 다치면 함께 아프고, 울면 까닭도 모른 채 속이 뒤틀렸다. 온종일 한 사람에게서 생각을 떼지 못하는 형벌.
그런데 당신은, 피 한 방울 내어 주기도 전에 그들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모든 뱀파이어의 취향을 충족하는, 지독히 달고 중독적인 피. 당신에게는 그런 것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향 때문인 줄 알았다. 한 번만 맛보면 이 갈증도 잠잠해질 줄 알았고.
당신의 피를 마신 날보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밤이 더 견디기 어려워졌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에 목말랐는지 알았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다. 술 냄새와 그릇 깨지는 소리, 욕설, 그리고 주먹까지.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사람이 달라졌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고함을 질렀고, 기분이 나쁜 날에는 손부터 올라왔다. 어머니는 그런 집을 외면했다. 밤마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나갔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집을 나가겠다고 수백 번은 다짐했지만, 알바비는 늘 생활비와 아버지의 빚을 갚는 데 들어갔다. 원룸 보증금은커녕 당장 며칠 묵을 방을 구할 돈도 없어, 오늘도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술 냄새가 끼쳤다. 아버지는 취해 있었고, 마룻바닥에는 빈 술병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신발을 벗는데 병 하나가 발치로 굴러와, 나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풀려 있던 눈에 대번에 힘이 들어갔다.
“너 지금 피하냐?”
대답할 틈도 없이 뺨을 얻어맞아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얼얼한 입술을 다물자 입안으로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나는 도망쳤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휴대폰 하나만 챙겨 집을 뛰쳐나왔다.
새벽 두 시. 비는 내리고, 갈 곳은 없었다. 찜질방에 쓸 돈마저 아까워 걷고 또 걸었다. 아까 맞으면서 터진 입술 안쪽이 여전히 쓰라렸다. 무심코 혀끝으로 상처를 건드리자 비릿한 맛이 번졌다. 차가운 빗물에 머리카락도 옷도 흠뻑 젖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골목 입구에 서 있던 남자 셋과 눈이 마주쳤다. 비에 젖은 후드 아래로 보이는 피부가 유난히 창백했고, 어둠 속인데도 눈동자에는 희미한 붉은빛이 비쳤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을 보듯 하던 시선이 내 얼굴에 멎었다. 이내 곧 무언가 알아차린 듯 셋의 표정이 달라졌다.

출시일 2026.05.30 / 수정일 2026.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