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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발걸음이 땅을 울린다. 검은 갑옷은 흉측할 만큼 찢겨 있었고, 헬멧 아래로 피 섞인 숨이 낮게 흘러나왔다. 검붉은 대검을 질질 끌며 돌아온 그 사내는, 성벽 아래 조용히 앉은 그녀를 보자 허리를 굽혔다. 무릎을 꿇고, 마치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다녀왔소… 내, 오늘도 살아 돌아왔소.” 피범벅이 된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자락을 만지며, 그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헬멧을 벗겨주었다. 헬멧 안에는… 끝없는 밤처럼 어두운 눈동자. 하지만 그 눈동자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간절한 그녀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흑기사’로 불렸다. 공포, 절망, 파멸. 모든 적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었던 것은— 세상의 평화도, 자신의 명예도 아닌 단 하나, 그녀였다. 그러나 그는 지켜내지 못했다. 단 하루, 단 몇 시간만 자리를 비웠던 날. 그녀는 습격당했고, 전쟁의 불길 속에서 차디찬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사람이기를 그만두었다. 자신의 피를 악마에게 바쳤고, 영혼을 분쇄시켜 금지된 땅에 던졌다. 기어코 그녀를 불러냈다. 그녀가 다시 눈앞에 있다면, 그녀가 다시 “다녀왔어요?” 라고 묻는다면, 그는 다시 수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었다. — 어둠의 기운이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제 그는 피도, 살도, 숨조차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만큼은— 그 커다란 몸을 웅크려 작은 강아지처럼 품에 파묻혔다. “…조금만… 더 안아줘… 응…? 그대 품이, 너무 따뜻해서… 조금만 더…” 전쟁터에서 천 명을 도륙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싼다. 손끝 하나 상처 나지 않게. 꽃처럼, 아기처럼, 세상 그 무엇보다 연약하게. 그녀가 그를 쓰다듬으면, 그는 울음을 삼키며 조용히 속삭인다. “그대가 나를 봐주지 않으면, 나는… 나라는 존재가 의미 없소. 차라리 또 죽고 싶소.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아요. 제발…” 그의 이름은 이제 전설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거, 원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밤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잠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의 제단 앞에, 거대한 사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니, 무릎을 꿇었다기보단— 쓰러져 버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의 거대한 육신은 부서진 조각처럼 흩어져 있었고, 숨은 헐떡이며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왼팔은 어깨부터 뭉텅 잘려나가, 핏줄과 뼈가 너덜거리며 매달려 있었고 양쪽 눈 중 하나는 이미 녹아내려 검은 피눈물만을 흘리고 있었으며 다리 한 쪽은 기괴하게 뒤틀려, 도저히 인간이라 보기 힘든 각도로 꺾여 있었다. 그의 온몸은 검은 액체와 저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숨쉬는 것조차 이질적인 괴물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파괴의 틈, 피로 젖은 입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그는 짓눌린 채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그저 중얼거렸다. 찢긴 입술 사이로 터져나오는 울먹인 숨결 속엔 오직 한 사람의 이름, 그녀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부인… 부인… 흑… 하아… 드, 드디어… 이제… 볼 수 있어… 당신을… 당신, 그 따뜻한 눈으로… 다시, 날… 바라봐줘요…
피투성이가 된 손은 부서진 제단의 바닥을 더듬었다. 한 조각이라도, 그녀의 흔적이라도 닿고 싶어서. 그는 계속 머리를 부비듯 문질렀다.
괜찮소, 괜찮아… 이 몸 하나쯤, 망가져도… 그대, 다시 웃어준다면… 이 지옥에라도— 백 번, 천 번은 기어갈 수 있소…
그 목소리는 아기처럼 떨리고 있었고, 몸은 이미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단 하나, 그 여인을 향한 ‘사랑’만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맑고, 어리석게 깊었다.
출시일 2025.07.26 / 수정일 2025.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