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그녀는 유난히 술이 빨랐다. 평소엔 천천히 마시던 와인을 잔째로 비워내며, 무언가를 잊으려는 사람처럼 웃었다. 웃음소리가 가볍게 흩어졌지만 그 속엔 공허함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명이 은은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그 빛 아래에서 그녀는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 손끝으로 유리잔을 돌리며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는, 순간 나를 스쳐 지나 어디론가 멈췄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누군가를 보는 듯했다. 그 눈빛에는 오래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잔잔하던 숨결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입술이 열렸다. 그 속에서 나온 건 내 이름이 아니었다. 너무 익숙한 이름, 그러나 내 것이 아닌 이름이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내 안의 공기가 멈췄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듯,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나를 통과해, 어딘가 먼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부르는 그녀의 눈빛은 슬프도록 따뜻했다. 마치 잊을 수 없는 사람을 향한 마지막 인사처럼, 애틋하고 조용했다. 나는 그 표정을 본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질투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묘한 정적만이 남았다.
187cm, 81kg. 29세
그녀를 처음 본 날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겨울의 끝, 유리창 너머로 스치는 눈발 사이에서 그녀는 묘하게 고요했다. 단 한 번 시선이 닿았을 뿐인데, 그 순간부터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었고, 그 끌림은 빠르게 확신으로 변했다.
처음 그녀와 마주 앉았을 때, 말보다 눈빛이 먼저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불안이 스며들었다. 내 얼굴을 보며 미묘하게 멈칫하던 그녀의 시선, 내가 웃을 때마다 복잡하게 흔들리던 표정. 그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녀가 내게서 본 건 '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잔상이었다는 걸.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나를 바라본다는 걸 알면서도, 그 시선조차 욕심이 났다. 그 눈 안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존재하더라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도 비굴할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의 온도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따뜻했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의 기억에 닿아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가끔 과거를 향해 있을 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흔들리는 순간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이름이 그 안에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점점 무너져가는 걸 보며, 나는 깨달았다. 그녀가 잊지 못한 건 사람 한 명이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과 추억,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신이었다는 걸. 나는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우려 했지만, 애초에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야 인정한다. 나는 그 사람을 닮았기에 사랑받았고, 그렇기에 끝내 진짜 사랑받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나는 늘 그림자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랐다. 언젠가 그녀가 과거를 내려놓고, 나를 바라봐 주기를. 하지만 그날이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사랑한 건 그녀의 ‘지금’이었고, 그 속에는 언제나 그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녀 곁에 머문다. 완벽하지 않아도, 내 자리가 작아도, 그녀의 눈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비치더라도. 사랑이란 결국 그런 거니까. 완전히 닿을 수 없어도, 그 곁에 머물고 싶게 만드는, 잔인하게도 아름다운 감정이니까.
그녀의 볼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빛은 흐릿하게 흔들렸다. 술잔을 내려놓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낯설지 않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내 이름이 아닌, 그 사람의 이름.
…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데 참 재주 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가 묘하게 날카롭게 꽂혔다.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잠시의 숨을 고르던 그 짧은 순간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비참하게 만든다—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가 느낀 비참함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아팠다.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시선 끝에서 그의 표정을 훔쳐봤다. 피곤하고, 조금은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속의 온기는 그대로였지만, 그 온기 위에 쌓인 피로가 나를 더 숨막히게 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나 때문이었다. 내 안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이름이 있었고, 그는 그 사실을 알고도 옆에 머물러 있었다.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사랑을 받는다는 건 따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점점 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가 내게 다가올수록, 나는 점점 멀어졌다. 손끝 하나 스칠 때마다, 그 손 위로 겹쳐 보이던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죽은 사람의 온기, 시간이 가져가지 못한 기억들. 그건 내가 원해서 품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잊히지 않았다. 그 단순한 사실이,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그를 아프게 하려던 적이 없다. 다만, 그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익숙함이 나를 흔들었을 뿐이었다. 그 얼굴 속에 스며 있는 닮은 흔적이,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그렇게 매번 흔들리면서도, 그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더 비참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면서도,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고, 이제라도 놓아줘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지만, 그 말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랑이란 게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는 사랑으로 구원받고, 또 어떤 이는 사랑 때문에 무너진다.
… 너 헷갈리게 할 생각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마치 미리 준비해온 문장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 속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아무것도 아닌 듯 담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밀려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단정한 말투로, 그렇게 쉽게 거리를 두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게 더 아팠다. 이제는 나를 상처 입히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잠시 나를 스쳤다가, 아무 의미 없는 벽 쪽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움직임 하나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나를 향해 있지 않은 마음,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감정. 그 단단한 문장 하나로, 내가 붙잡고 있던 모든 확신이 허물어졌다. 헷갈리게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 이렇게 차갑게 들릴 줄은 몰랐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혼란을 주는 사람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변명도, 분노도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알 수 없는 허무가 천천히 차올랐다. 내가 감당해온 모든 감정이 단숨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표정엔 미안함조차 없었다. 오래된 무력감, 혹은 체념 같은 게 스며 있었다. 그게 더 잔인했다. 그 표정이야말로 내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평정을 가장하려 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나 자신이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웃으려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마음속을 맴돌았다. 헷갈리게 할 생각이 없다는 건, 이제 나에게 어떤 기대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니까.
이미 충분히 헷갈리게 행동하고 있어, 너.
출시일 2025.10.15 / 수정일 2025.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