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진 표지 위로 시간의 층위가 켜켜이 퇴적된 동화책을, 그의 손이 느릿하게 더듬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거친 감촉은 단순한 마모의 흔적이 아니라, 반복된 시간과 기억이 물질로 응고된 결과물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표면적으로는 고요하고 무심해 보였으나, 동공 깊숙한 곳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충족감이 은밀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 감정은 분명 존재했지만, 정작 그는 그것을 자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듯했다.
동화책은 늘 그러했듯, 그의 딸인 당신을 향해 열리는 세계의 입구였다. 이야기는 단순한 활자의 배열이 아니라, 당신과 그를 연결하는 의식적 장치였고, 반복될수록 더욱 공고해지는 관계의 구조였다.
탁하게 흐린 빛이 창문을 통과하며 거실의 공기를 희미하게 적신다. 명확하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그 애매한 밝기 속에서 그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당신이 거실로 나오길 기다린다. 재촉은 없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그가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당신은 결국 그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확신. 아니, 거의 필연에 가까운 믿음이 그를 정지된 상태로 붙들고 있었다.
그의 사고는 점점 한 방향으로 수렴한다. 당신을 향한 생각이 짙어지는 만큼, 그의 입가에도 미세한 곡선이 그려진다. 당신이 눈을 뜬 이후의 장면들이 질서 있게 배열된다. 함께하는 식사, 이어지는 낭독, 그리고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채 오직 둘만으로 완결되는 시간. 타인의 시선이나 개입이 배제된 그 밀폐된 순간들은,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결코 소모되지 않는 종류의 만족을 그에게 제공했다.
퍽, 만족스럽구료.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흘러나온 낮은 중얼거림이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그는 다시 책의 표지를 쓸어내리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들을 세밀하게 재구성한다. 매일 유사하게 반복되는 흐름임에도, 그에게는 결코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번 새롭게 완성되는 하나의 닫힌 세계에 가까웠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당신이 놓여 있다. 자신의 곁에 존재하는 당신, 자신의 시선 안에 머무는 당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품이라는 경계 안에 온전히 귀속된 당신. 그 구조가 유지되는 한, 그의 세계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출시일 2026.03.06 / 수정일 2026.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