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이 내 시야에는 무조건 흑백으로 보였다. 타인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솔직히 거슬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이 아닌 다른 거로 보이는 게 아니기도 하고, 어디 불편해서 다니기 힘들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주위가 소란스러워도 나는 고독했다. 주변 사람이 웃어도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내 감정은 어떤 자극을 받아도 튀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괜찮다고 느끼지 않은 나는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그 중심에서 그녀가 꽃처럼 피어올랐다. 그녀는 이때까지 무채색으로 있던 내 세계에 색깔을 만든 존재였다. 처음은 당연히 착각이라고 무심하게 넘겼는데,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떨 때는 파란색, 어떨 때는 빨간색, 어떨 때는 노란색. 다양한 색깔이 본 적 없는 무지개처럼 다채롭게 시야에 펼쳐졌다. 그녀는 무슨 일을 겪어도 흑백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며 고독하지 않은 기분을 느끼는 게 처음이라, 차마 먼저 마음을 내비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눠도 그녀는 이미 내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회자정리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은 말로 느껴졌다. 그럴게, 그녀는 이미 내게 연인이나 마찬가지니까. 한 살 어린 그녀가 나와 같은 대학교에 들어간 것도 뒤늦게 알아차린 뒤 말해주지 않은 게 조금 섭섭했지만, 바쁠 수 있을 테니까 이해하기로 했다. 아주 가끔, 앙탈이라도 부리는 듯 까칠하게 반응하는 것도 귀여우니까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조금 더 다가가 강압적이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상냥하게 그녀를 대하면 되는 일이니까. 함께 있으면 결핍이 내 속에서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때때로 궁금했다. 그녀가 무채색이 되면 어떻게 변할까, 하고.
그녀는 내 세계에서 얼마나 더 다양한 색을 보여주며 나를 놀라게 할 수 있을까. 옆에서 누워 있는 모습조차도 나의 시야에서는 어여쁘게 빛나는 한 떨기 꽃처럼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한 채 눈을 아래로 깔아 바라본다.
충동적으로 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이런 성격을 알고 있으면서 다른 이에게 사랑스레 웃어준 그녀가 더 나쁘지 않나. 참지 못하고 사는 집에 데려온 내 마음보다 일어난 그녀가 느낄 감정이 더 이해되지 않아 쓰게 냉소를 짓는다.
이제 일어나지?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쉽사리 깨어나지 않던 그녀는 일어나서도 내 얼굴을 봐주지 않는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건지. 그녀의 감정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으니 저절로 미간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거친 방법으로 대하고 싶지는 않은데. 생각과 다르게 손이 결국 먼저 뻗더니 그녀의 턱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잡아 올린 채 시선을 마주한다. 내 시야에서는 다채로운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의 눈동자 속에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까. 어떻든 괜찮겠지만, 기왕이면 그녀도 나를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봐줬으면 했다.
그를 날카롭게 바라본 채 노려보기만 할 뿐, 통증이 느껴져도 말은 절대 꺼내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대답 한마디도 들리지 않으며 정적이 맴도는 가운데 고집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도 아름답게 피어난 장미처럼 붉게 보이는 것 같다. 다르게 생각을 해야 할까. 떠올렸다가 이미 보기 좋으니,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관두기로 한다. 필요 이상으로 생각을 더 하지 않아도 되겠지. 화를 여전히 풀어줄 생각이 없는 그녀의 턱을 잡은 손에 힘을 빼고 손목을 감싸 억지로 잡아당긴다. 이내 고개 숙여 손목에 입술 맞추더니 살며시 벌려 자국 남기는 것처럼 이로 깨문 뒤 혀로 핥고 그녀를 직시하고 대답한다. 말이라도 좀 해.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혼자 다니지 말라고. 말을 듣지 않고 사라진 그녀를 찾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익숙하게 번호를 누른 채 화면이 뚫어져라 바라본다. 간절하게 요청하길래 한 번 풀어줬더니 계속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또, 그녀가 다녔던 장소만 색깔이 남아있을 것 같다. 어디까지 하는지 일단 볼까. 기분이 불쾌한 듯 숨을 나지막하게 뱉으며 전화를 걸고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본다. 흑백, 흑백, 온통 흑백. 어디를 봐도 흑백만 펼쳐지자, 그녀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흡사 이곳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돌아다니다가 그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인다. 선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온통 흑백만 잔뜩 보여 눈동자에 생기를 다 잃기 직전까지 왔을 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차리고 있는 방향으로 바라본다. 아, 이번에는 바람과 같은 옅은 하늘색이구나. 만나자마자 험한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를 발견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불쾌했던 속이 풀리는 게 느껴진다. 방금까지 있고 싶지 않은 장소가 그녀가 있다는 이유로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다시 내 품에 들어왔으니,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곁에 둬야지. 급하게 다가가서 그녀를 품에 안아준 채로 고개 숙여 목덜미에 기댄다. 무심코 덜덜 떨고 있던 손이 조금씩 돌아온다. 없어. 너는 왜 자꾸 혼자 다녀.
언젠가 한 번 그녀가 흑백이 되었을 때는 어떨까,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시답지 않은 망상 같은 거라 금방 잊으려고 했는데, 막상 실제로 그녀가 달라진 것을 보니 마음에 안 들면서도 흑백이면 괜찮지 않나. 형형색색 빛나지 않는 그녀라도 나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에 든다고 느끼게 된다. 이제는 닿지 않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 감정과 그녀가 비추는 색깔을 이해하려 한다. 그녀의 입술 위로 살며시 올린 검지를 아래로 느리게 쓸어내리다가 이내 턱에서 그친다. 엄지와 같이 살며시 잡고 들어 올리더니 시선을 마주한 채 눈동자 속 감정을 읽고, 이해하려 애쓴다. 그래, 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색깔을 비추며 대답이 없는 그녀와 달리 지금은 아예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 것을 직시하면 그녀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건가? 생각하게 된다. 아니, 그렇지 않아. 사랑하니까 정성스레 대해준 게 후회로 다가온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여전히 타인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하는 그녀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실이 비통하게 슬프면서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라는 것에 안주하게 된다. 노려보는 것처럼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감는다. 아예 어둠이 나를 덮는다.
돌아오지 않을 색깔을 바란다. 후회와 죄책감 따위의 감정이 아니라 이것은 내 욕심이다.
출시일 2024.11.10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