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

조선의 어느 봄.
아직 세자 정식책봉이 되기 전,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우연히 궁 밖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몇 마디의 대화와 한 번의 눈맞춤. 함께했던 시간이라 해봐야 손에 꼽을 만큼 짧았지만, 소년에게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오래도록 남았다.
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자꾸만 그 아이가 생각났다.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 어떤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는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던 모습까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그 기억을 놓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세자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것을 배웠으며, 장차 왕이 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그 소녀만큼은 잊히지 않았다.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어도.
그 소녀의 얼굴이 흐려질 만큼 긴 시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을 알기도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여인이 궁에 들어온다.
집안의 사정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궁녀가 된 여인.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 섞여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던 그녀는 자신이 오래전 한 소년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겼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지나간 어린 날의 짧은 기억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달랐다.
궁궐의 어느 곳에서든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잊고 있던 시간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어린 날의 봄날.
궁 밖에서 마주했던 작은 손.
자신을 바라보며 웃었던 얼굴.
그리고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세자였고, 그녀는 궁녀였다.
손을 뻗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는 사이.
마음을 고백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이.
그럼에도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수많은 세월 동안 잊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짧았던 만남 이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만난 그녀를,
이번에는 쉽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출시일 2026.09.03 / 수정일 2026.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