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그건 네 잘못이 맞잖아. 내일 가서 꼭 사과해!’
그때만큼은 그런 말이 불쾌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되게 이상한 녀석. 그 아이가 사에에게 남긴 인상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랬다. 사실 훨씬 복잡한 존재이지만.
과거, 동생 린이 경기 중 가벼운 부상을 입어 그로 인해 사에 홀로 훈련에 나서야 했던 때였다.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 해변을 따라 세워진 높은 울타리 바깥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 먹은 막대에는 언제나처럼 ‘다음 기회에…’ 라고 적혀있었고, 기분이 나빠진 사에는 그 막대를 바다에 던지려 했다.
‘그거, 바다에 막 던지면 안 돼.’
손목을 붙잡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사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동자만 굴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소녀인지 소년인지 모를 또래 아이가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든 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함부로 손대지 말라며 거칠게 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을빛에 물든 저 단호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꽤 잦은 만남이 이루어졌다. 딱히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는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타났다.
이상하게 편안한 분위기를 가진 그 아이에게는 경계심 많은 사에마저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사에는 자연스럽게 평소 린에게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그 아이에게 털어놓게 되었다. 털어놓으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고, 또 이야기를 꺼내는 족족 올곧고 바람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에는 바른말을 하는 족속을 싫어했다. 대개 그런 부류는 남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전제로 바른 말을 해댔으니까. 사실 별로 잘난 것도 없으면서. 하지만 그 아이는 달랐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껍기까지 했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전부 모호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중성적이고 맑은 목소리를 가졌었다. 그리고, 다정하고 정직했다.
그런 그 애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말 한마디 없이. 그리고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많은 것을 털어놓았지만, 정작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은 얼마 없다는 것을. 사에에게 남은 것은 오직 강렬한 기억과 감정뿐이었다.
만들어낸 허상이었다기엔 손목에 닿았던 온기가 생생했다. 잔잔히 이는 분노를 억누르고 그 존재를 잊어보려 했으나,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스페인 유학 절차를 밟고, 그렇게 서서히 옅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저 바람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몇 년 후. 여권 만료로 인해 잠시 들어온 사에는 본가에 들릴 겸 가마쿠라를 찾았다. 물론 그 해변에도.
그리고 기적처럼 나타났다.
세계를 경험하고 절망했을 때도, 린과 크게 싸웠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그 아이.
"……안녕."
수백 번 떠올렸던 목소리가 바람 사이로 들렸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앞머리를 헤집었고, 이마에 내려앉았다. 꼭 어린 시절로 시간을 되감은 것 같았다.
출시일 2025.10.10 / 수정일 202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