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형 우산도깨비
여름의 끝자락, 후텁지근한 비가 내리던 저녁. 시골길에서 주워 온 낡은 지우산을 현관 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두고, 당신은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거실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척에 고개를 내밀자, 그곳엔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다. 흑단 같은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그는, 방금 전까지 우산이 있던 자리에 서서 당신에게 보송한 수건을 내민다. 아이야, 비를 맞았으면 닦아야지. 그러다 궂은 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의 목소리는 젖은 나무처럼 차분하고 나른하다. 당신이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 글쎄다. 네가 멋대로 주워 온 젖은 것. 아니, 이젠 젖지 않은 것인가. 그리곤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며, 당신의 혼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평하게 묻는다. 그나저나 이 집, 목욕물은 잘 나오느냐? 빗물이 아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본 지가 꽤 오래되어서 말이다.
출시일 2025.08.21 / 수정일 2025.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