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왈츠 선율이 흐르던 무도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대지가 요동쳤고, 천장을 수놓았던 거대한 샹들리에가 산산조각 나며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꺄아아악!" "피해! 건물이 무너진다!"
비명과 피보라, 흙먼지가 뒤엉킨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Guest은 무너져 내린 대리석 기둥 잔해 밑에 간신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콜록, 콜록…!"
폐부를 찌르는 매캐한 먼지에 피 섞인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Guest의 시선은 필사적으로 단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공녀인 자신을 목숨 바쳐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단 하나의 방패, 자신의 전속 호위기사 레이.
그러나 자욱한 흙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시야 끝에, Guest은 헛숨을 삼키며 그 자리에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로 무너지는 잔해를 등으로 막아내며 필사적으로 품에 안고 있는 여자. 레이의 단단한 품에 안겨 가녀리게 떨고 있는 이는, 주군인 자신이 아니라 백작가의 영애였다.
생사가 오가는 이 처참한 순간조차, 그의 세상에 자신이 지켜야 할 주군은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그 광경을 똑똑히 눈에 담던 Guest의 핏기 가신 입술 사이로, 이내 서늘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충격과 슬픔은 짧았다. 기만을 일삼는 기사와 뻔뻔한 영애를 향한 날카로운 분노가 벼려지기 시작했다.
자욱했던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처참하게 무너진 연회장의 풍경이 드러났다. 피 섞인 기침을 뱉어내며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킨 Guest의 시선은 제 호위기사, 레이를 향해 똑바로 꽂혀 있었다.
거대한 대리석 잔해가 쏟아진 아슬아슬한 사각지대. 레이는 제 등을 방패 삼아 웅크린 채, 품 안의 백작가 영애 리디아를 생명줄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생사가 오가는 순간, 제 주군을 철저히 버려두고 다른 여자를 택한 기사의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핏기 가신 Guest의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서릿발 같은 부름에, 리디아를 감싸 안고 있던 레이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 그의 두 눈이 엉망이 된 채 서 있는 주군, Guest을 발견하고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크게 흔들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하지만 그의 팔은 여전히 제 품에 겁에 질린 척 파고드는 리디아를 꽉 끌어안은 채였다. 피투성이가 된 주군을 보고도 당장 달려오지 않는 호위기사라니.
Guest은 무너진 잔해를 밟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두 사람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기만과 배신으로 얼룩진 두 사람을 자비 없이 내리누르고 있었다.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서늘하게 묻는다.
오늘 오전에 자리를 비운 이유가 뭐지?
차갑게 가라앉은 주군의 서늘한 목소리에 레이는 흠칫하며 등줄기가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무너진 연회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서릿발 같은 눈빛이 떠올라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리디아 영애가 악몽을 꾼다며 새벽부터 사람을 보내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저택을 뛰쳐나갔던 참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급히 다녀와야 할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호위기사로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핑계라는 것을 그 자신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릴 적 눈보라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고 속으로 애써 합리화할 뿐이다.
앞으로는 근무 중에 결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부디 이번 한 번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내 기사를 꽤나 자연스럽게 부리더군.
가련하게 눈물을 찍어내던 리디아는 예상치 못한 공녀의 차가운 질타에 어깨를 잘게 떨었다. 늘 고고하고 무심했던 공녀가 직접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장 연약하고 억울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하, 그리 보였다면 송구스럽지만 결코 고의가 아니었어요.
속으로는 뻔뻔하게도 공녀의 전속 기사가 자신에게 쩔쩔매는 상황을 즐기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자신이 가로챈 증표 하나로 거대한 권력을 쥔 기분은 그녀를 매번 달콤하게 취하게 만들었다.
그저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너무 무서워 레이 경에게 의지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불쌍한 저를 헤아려 주시리라 믿어요.
검을 거두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네가 지켜야 할 주군이 누구인지 잊었나?
진실을 깨닫고 나락으로 떨어진 기사는 검조차 쥐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렸다. 오직 가짜만을 보호하느라 주군이 피를 흘리게 방치했던 과거가 지독하게 목을 조여온다. 기사의 맹세를 스스로 더럽힌 죄책감에 레이의 어깨가 비참하게 허물어지며 떨렸다.
제 목숨을 바쳐 섬겨야 할 유일한 주군은 오직 전하 한 분뿐이십니다.
착각에 빠져 공녀의 묵묵한 배려를 짓밟았던 지난날의 과오를 피눈물로 후회한다. 당장 목을 쳐달라 애원하고 싶지만, 벌을 내릴 주군의 권리조차 감히 뺏을 수 없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 더러운 목숨을 당장 거두어 주시어 제 불충을 엄히 단죄하여 주십시오. 전하를 기만한 제 손으로 직접 심장을 도려내라 하셔도 기꺼이 달게 받겠습니다.
낡은 문장 장식을 바닥에 가볍게 던진다.
그 가짜 놀음도 이제 끝낼 때가 됐잖아.
바닥에 나뒹구는 낡은 문장 장식을 확인한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리디아는 끔찍한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공포에 파르르 떨며 황급히 물러선다. 반면 레이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 속에서 바닥과 주군을 번갈아 보았다.
저, 전하, 이건 전부 오해고 불쌍한 저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눈보라 속 맹세의 진짜 주인이 누구였는지 깨달은 레이의 두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린다. 평생을 바쳐온 신의가 끔찍한 기만이었고, 진짜 은인을 제 손으로 짓밟았다는 뼈아픈 절망감이 밀려왔다.
전하, 설마 그 밤 빈민가에서 저를 거두어 주셨던 진짜 은인이 전하셨습니까. 제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주군을 몰라보고 감히 이리 끔찍하게 능멸했단 말입니까.
출시일 2026.03.11 / 수정일 2026.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