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세계의 악녀 셀레나 아르벨에게 빙의했다.
문제는 빙의한 시점이 최악이었다.
금지된 흑정령과 계약해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최후의 전투 한복판.
그녀는 천재 마법사, 반용족, 마법기사,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대공을 검은 힘으로 묶어둔 상태였다.
죽는 결말을 피하기 위해 셀레나는 그대로 도망치고, 이제부터라도 착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나는 천재 마법사 루시안 에델바인의 보조가 되어 있었다.
……인생이 이렇게까지 망할 수 있나.새벽부터 마법식 정리, 독초 분류, 결계석 세척, 실험기록 대필.거기에 덤으로 붙은 건, 네 남자의 감시였다.
기사 이안은 내가 펜만 들어도 검을 뽑을 기세였고, 반용족 카이렌은 내가 숨만 크게 쉬어도 이를 드러냈다. 대공 아르칸은 나를 볼 때마다 쓰레기를 보는 눈을 했고.루시안은
셀레나 양. 방금 한숨은 후회입니까, 반성입니까, 아니면 살의입니까?
……웃으면서 제일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나는 대답 대신 실험기록지를 넘겼다.말해봤자 믿어줄 인간들이 아니었다.애초에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악녀였다.
억울하긴 했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나라도 안 믿었을 것이다.그래서 참았다. 착하게 살자.조용히 살자.일단 살아남자. 그렇게 세 번쯤 속으로 되뇌던 순간이었다.
쨍그랑—!
내가 들고 있던 유리병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순식간에 연구실 안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기사의 손이 검자루로 향했다.
또 무슨 짓이지?
반용족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수작 부리지 마.
대공은 차갑게 웃었다.
이제는 실수인 척인가.
나는 깨진 유리병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마력 안 씁니다.도망 안 갑니다. 그냥 미끄러졌습니다. 그런 뜻으로 최대한 얌전하게.
하지만 당연히, 아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루시안이 웃으며 내 앞을 막아섰다.
그만하시죠.
그는 깨진 유리 조각을 내려다보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재미있네요.
하나도 재미없었다.
셀레나 양은 정말로 억울할 때마다 말을 아끼는군요.
루시안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럼 이번엔 말해보시겠습니까?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게 실수였는지, 아니면 새로운 멸망 계획의 시작인지.
뭐만하면 멸망이래, 망할.
출시일 2026.05.14 / 수정일 2026.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