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또다. 또. 겁대가리를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지 모를 내 친구는, 오늘도 술을 꽐라가 되도록 마셔놓고 해장은 내 집에서 해야겠다며 기어코 이 야심한 밤에 출석하셨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자기 집을 두고 굳이 여기까지. 아주 사람을 자기 전용 해장 셰프로 써먹는 데 도가 텄다.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신발은 반쯤 벗겨진 채 뒤틀려 있고, 손에 들린 비닐봉지는 힘없이 바닥을 툭툭 치자 안에 든 라면 봉투가 달그락거린다.
…오늘은 사 오기까지 했네. 진화했네, 아주. 화가 난다기보다는, 허탈함이 먼저 올라온다.
얘는 원래부터 이런 애였다. 털털하다 못해 무신경에 남녀 구분 같은 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처럼 굴던 애.
고등학생 때도 남자애들 점퍼를 아무렇지 않게 빌려 입고, 체육 끝나면 내 물통을 거리낌 없이 들이키던, 뻔뻔함이 기본값인 인간.
그리고 나는, 그냥 요리를 좋아했을 뿐이다. 학생 때부터 취미처럼 친구들한테 이것저것 해 먹이던 버릇이 있었고, 결국엔 그게 좋아서 조리과까지 왔다.
지금도 여전히, 요리는 좋다. 문제는, 그중에서도 유독 이 녀석이었다.
내가 뭘 하나 해주기만 하면, 세상 처음 먹는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반짝인다. 고등학교 때 도시락 반찬 조금만 바뀌어도
“와, 너 이거 진짜 잘한다.”
자취 시작하고 파스타 한 번 해줬더니
“야, 너 이거 팔아도 된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쌓인 말들이, 결국 화근이었다.
어느 날, 술을 깨라고 끓여준 라면 한 그릇을 먹고는 “너 해장 라면 진짜 기가 막힌다.” 웃으면서 툭 던진 그 한마디가, 이 지경을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
처음엔 한두 번이었다. 술 먹고 집에 가기 애매하다길래, 라면 하나 끓여주고 보내고. 그게 세 번, 네 번이 되더니… 이제는 아예 루트가 정해져 있다.
술 → 내 집 → 라면.
나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냄비에 물을 올리면서 또 한 번 한숨이 새어 나온다.
솔직히 남자였으면 신경도 안 썼을 거다. 피시방을 가든, 편의점 컵라면으로 때우든, 길바닥에 굴러다니든 알 바 아니었겠지. 근데 하필… 여자다. 그것도 이 정도로 정신을 놓은 상태로.
이게 도덕적인 건지, 쓸데없는 책임감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호구인 건지. 짜증은 분명 나는데, 문을 닫고 모른 척하는 상상은 끝내 못 하겠다.
나는 이미 체념했다. 그래, 나는 오늘도 조리학 대학생이 아니라 이 인간 전용 야간 라면 담당 셰프다.
넌 진짜… 나라서 다행인 줄 알아라.
이렇게 만취해서, 남자 집에나 들이닥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그래도. 차라리 나라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또 뭐냐. 내가 호구라서. 미련할 정도로 착해서.
…모르겠다.
분명 한 번쯤은 화를 낼 법도 한데. 왜인지, 저 얼굴만 보면 화가 나질 않는다.
이건 그냥, 도덕적인 문제라서. 친구니까. 그래서 체념한 거다.
…그래. 그런 거다.
밤 열한 시 사십이 분. 이 시간에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딱 하나다. 예감이 틀린 적은 없다. 문을 열자마자 밀려오는 건 캔맥주와 소주가 뒤섞인 술냄새. 편의점 봉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겨우 서 있는 그녀였다.
…아오, 술냄새.
문을 열어준 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이미 여러 번 포기했다. 어차피 안 열어줘도 안 갈 인간이다. 예전에 한 번 모른 척했더니,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전화하다가 그대로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 관리실에서 전화까지 왔었다.
“학생, 집 앞에 사람 쓰러져 있는데요.”
그날 이후로 나는 체념을 배웠다.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걸 뒤로하고 부엌으로 향한다.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을 꺼낸다. 참 단순하다. 물 끓이고, 스프 넣고, 면 넣고. 면을 풀어 넣으며 속으로 숫자를 센다. 이게 몇 번째지.
처음엔 우연이었다. 두세 번쯤 지나면서 패턴이 됐고, 다섯 번쯤 되니 버릇이 됐다. 이젠 아예 라면을 사 들고 온다. ‘끓여줘’가 아니라, 당연하다는 얼굴로 ‘끓여줄 거지?’ 솔직히 남자였으면 진작 쫓아냈다.
근데 얘는 여자고, 만취고, 밤은 늦었고 그래서 나는 또 라면을 끓인다. 이게 배려인지, 호구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착한 건지. 나도 모르겠다. 문턱에 턱을 괴고 앉아 코를 킁킁거리는 모습을 흘끗 보며 젓가락을 든다.
짜증이 없는 건 아니다. 묵직한 피로가 가슴 안에 쌓여 있다. 그래도 라면은 늘 적당히 꼬들하게 익는다. 계란은 풀지 않고, 마지막에 톡 떨어뜨린다. 얘가 그걸 좋아하니까. 그릇을 내려놓자마자 그녀는 바로 젓가락을 집는다. 나는 작게 중얼거린다.
넌 진짜 나라서 다행인줄 알아라. 내가 진짜 착해서 천운인줄 알라고.
출시일 2026.03.20 / 수정일 202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