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비티아이 같은 검사가 생기기 전부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은 계획이었다. 시간은 분 단위로 쪼개졌고 모든 일은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가야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인생은 단순했고, 문제라는 건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업을 군인을 선택했다. 각 잡힌 동작, 완성된 매뉴얼,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조직. 질서와 통제가 미덕인 곳은 말 그대로 내 천직이었다.
결혼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연은 믿지 않았고, 중요한 선택을 감정에 맡길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소개팅을 나갔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다.
그 만남도 분명 계획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 여자는 내 인생에 등장한 모든 변수의 집합이었다. 시간 개념은 흐릿했고, 이야기는 늘 중간에서 방향을 잃었으며, 뭐든 적당히라는 게 없었다. 첫 만남이 끝났을 때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아, 여기까지구나.
그런데 인생이란 게 원래 결론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그 여자는 몸소 친절하게 증명해줬다. 이상할 만큼 그녀는 계속 연락했고, 계속 웃었고, 계속 아무 생각 없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애쓰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녀와 있으면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긴장하지 않아도 됐고, 앞날을 계산하지 않아도 됐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굳이 정의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의한다고 해서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연애는… 솔직히 말해 순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순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늘 지금을 살았고, 나는 늘 다음을 걱정했다. 그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 많이 싸웠고, 그때마다 나는 ‘이건 효율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헤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귀찮아질 정도로 이 여자를 이해하려 애쓰는 나 자신이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년의 연애 기간 동안 그녀는 내 멘탈을 거침없이, 주저 없이 아주 철저하게 탈탈 털어갔다.
이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쯤 마지막 결정타는 예상치 못한, 정말 그녀다운 프로포즈였다. 티비를 보다 말고 세상 태평한 얼굴로 대뜸.
“우리 심심한데 결혼이나 할까?”
결국 그 한마디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이 여자한테는 못 이긴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사람을 떠나는 게 함께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피곤하겠구나.
결혼 이후 나는 365일 아내라는 변수와 함께 산다. 이제는 빼내고 싶어도 너무 깊이 뿌리내린 존재다. 아내는 여전히 즉흥이고, 나는 여전히 한숨을 쉰다. 가끔은 멍하니 천장을 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체념과 해탈로 지킬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래, 그쯤이야.… 그래도 사랑하니까.
어. 사랑해, 여보. 진짜로…
느긋하게 소파에 누워 릴스를 넘기고 있었다. 손가락은 생각보다 빠르고, 생각은 그보다 더 느렸다. 그러다 제주도 바다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파란색, 바람, 햇빛.
아, 맞다. 이번에 휴가 겹친다 했지.
딱히 계획한 건 아니었다. 어디를 갈지, 언제 갈지, 뭘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영상이 좋다’는 감정 하나로 머릿속이 가볍게 흔들렸을 뿐이었다. 나는 거의 숨 쉬듯 말을 내뱉었다. 고민은 없었다.
우리 간만에 바람 쐬러 갈까? 제주도 어때? 요즘 사람들 많이 가던데.
휴가 일정이 겹치는 일은 드물다. 서로 다른 일정, 다른 리듬으로 살아온 탓에 우연처럼 맞아떨어지는 날은 늘 귀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내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 한마디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세상 뜬금없이, 예고도 없이 이미 목적지까지 정해진 그 가벼운 제안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제주도’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머릿속에서는 이미 플랜과 계획이 코딩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의지와는 상관없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래.
모든 경우의 수를 대략 훑고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자 두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노트북을 열었다. 엑셀을 켜고, 새 파일을 만들고, 셀을 나누고 틀을 잡았다. 이제 막 첫 칸을 채우려던 순간. 탁- 노트북이 닫혔다. 고개를 들자 아내가 손을 얹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들려오는, 세상 천하 태평한 한마디.
또 이럴 줄 알았지. 아휴, 피곤해.
나는 최대한 태평한 얼굴로 덧붙였다.
여보, 이런 건 즉흥으로 가야 하는 거야.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툭’ 하고 부러졌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아직은.
‘그래, 침착하자. 이건 싸움이 아니다. 휴가다.’
아내는 정말 태평했다. 아니, 태평을 넘어 세상이 늘 자기 편인 사람 같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한숨이 먼저 나올 것 같아 턱에 힘을 줬다.
아니, 즉흥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속에서는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뚜껑 닫힌 냄비처럼, 소리 없이. 비행기 표는 오를 거고, 숙소는 남아 있을지 모르고, 맛집은 줄이 길어질 테고, 우리는 분명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하게 될 텐데.
그 모든 걸 ‘피곤한 짓’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순간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 의지를 쉽게 꺾을 수는 없었다. 나는 애써 차분하게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발 오늘은 언쟁이 아니라 설득으로 끝나길 바라면서.
그래도, 기본적인 건 정해 둬야지.
출시일 2026.02.06 / 수정일 2026.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