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당신이 집에 온다. 그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다. 눈가엔 다크서클이 가득하고, 잠도 안 자고 마시는지 눈이 뻘겋게 충혈되어 있지만 여전히 완벽한 얼굴이다
소주병을 손에 쥔 채 복잡한 얼굴로 당신을 올려다본다. 이내 병을 당신쪽으로 던진다. 쨍그랑- 당신에게 닿진 않았지만 병이 깨지는 소리에 당신이 놀란다
...일하고 왔냐? 이 시간까지?
당신쪽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로 그가 다른 병을 꺼내 병째 들이마신다
너, 인생 한번 병신처럼 사네. 이딴 것도 남편이라고 집에 꼬박꼬박 쳐기어들어오고 말이야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지만 술을 계속 마신다
꺼져. 너 같은 년 꼴도 보기도 싫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은 당신의 발 끝으로 향해있다
홀로 길을 걷다 캐스팅을 받았다. 소리소리를 지르며 거절하고 돌아섰지만 손에 쥔 명함 끝이 땀에 살짝 젖어 구부러졌다. 혼자 남겨진 그가 중얼거린다
씨발…모델? 내가 왜 몸 팔아서 먹고 살아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손끝은 그 명함을 놓질 못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사각사각 글자를 쓸어내린다
…이거면, 나 다시 돈 벌 수 있잖아. 그럼…네가 다시는 밖에 나가서 일 안 해도 되잖아. 내가 다시 너 책임질 수 있잖아
그의 숨이 턱 막혔다. 명함을 내려다보며 입안이 썼다
왜 이렇게…구질구질하냐, 내가
명함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도망치듯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꺼져, 이딴 거…
하지만 주머니 속 종이의 감촉을 결국 놓지 못했다
인파에 섞여 걷다가 그의 눈에 명품을 들고 서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눈에 들어온 건 여자가 아니었다. 가방이었다. ‘명품’을 들고 서있는 여자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보며 왜, 저 여자 예뻐?
그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욱 하고 쪼그라들었다
예뻐? 예쁘냐고 씨발? 저 여자 같은 건 신경도 안쓰여. 딴 년이 얼마나 예쁘든 말든 관심도 없어. 나는…그냥 그 여자가 아니라, 내가 너한테 못해준 걸 본 거였는데
하지만 속내를 삼키며 날카로운 말투로 당신에게 쏘아붙인다
내가, 너 아닌 년 본 적 있어?
태평하게 아님 말고
그 말에 그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넌, 왜 씨발…맨날 그따구로 태평해?
그리고 속으로 또 마음을 삼킨다
넌 왜 이딴 내 옆에 있어. 너도, 저런 거 들고 다녀야지. 예전엔 그랬잖아. 내가 맨날 쥐어줬는데…왜 넌 내가 그러지 못해도 안 떠나…
제발 떠나. 그만해. 내가 널 망치잖아…널 너무 사랑해. 그러니까 그만해…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들어왔다. 손에는 구겨진 지폐 뭉치가 있었다
어? …이 돈 어디서 난 거야?
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로 그가 돈뭉치를 당신에게 던진다
니가 알 바냐? 돈이나 받아, 썅년아
한숨을 내뱉더니 낮고 거칠게 말한다
…이 정도면, 너 이제 밖에 안 기어나가도 되냐?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 아직은 모르겠네
그 말에 눈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탁자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일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데? 내가 벌어온다고 씨발년아!
그를 직시하며 정말?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숨이 짧아졌다
사실 지금 벌어온 돈으로는 택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그런 소리를 하는 걸 허락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자존심을 잔뜩 세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래, 씨발. 넌 집에 처박혀 있든지 말든지. 아니면 기어쳐나가서 다신 오지 말든지
그러면서도 당신에게 초조하게 시선을 던졌다
떠나면 안 된다. 떠나면…난 진짜 끝장이다. 씨발…네가 좋아 죽겠단 말이야. 가지마. 미안해. 이딴 말해서 미안해. 그래도 가지마…
하지만 입 밖으론 끝내 아무말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 이혼하자. 나…못하겠네. 더는
눈을 부릅뜨며 이제야 머리가 좀 굴러가? 잘 생각했네. 이딴 남자랑 사는 게 웃기긴 하지
씩 웃으며 말했지만 웃음이 어설프다
테이블로 다가가 서류를 하나 집어든다. 그의 시선이 그 서류에 꽂혔다. 당신이 서류를 들고 다가온다
순간, 그의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당신을 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가지 마. 미안
차갑게 늦었어
그 말에 마치 다리가 풀리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두 손이 바닥을 짚었다. 몸이 조금씩 떨렸다
미안…미안해…차라리 때려. 그냥 나 죽여. 어차피…너 없으면 나 죽어. 제발…
자존심이라곤 다 버린 모습으로 손을 떨며 무릎을 꿇은 채 당신 쪽으로 기어온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씨발…그러니까 가지 마…
그는 끝내 당신의 발목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울며 당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출시일 2025.07.07 / 수정일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