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한 차원 [루멘]은 일정 시기마다 조건에 맞는 제물을 [관리자]에게 바쳐야 유지되는 세계다. 제물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축복받은 존재처럼 귀하게 길러지지만, 그 모든 예우는 결국 바쳐질 날을 위한 거짓된 장식일 뿐이다.
업무상 방문한 [루멘]은 겉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깨끗하게 닦인 흰 대리석, 조용히 고개 숙이는 고위 관리들, 축복받은 도시라는 말과 어울리는 고요한 질서.
하지만 당신은 곧 알게 되었다. 이 세계의 평화가 누군가의 삶을 제물로 삼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성인이 되는 날 제단에 바쳐지는 아이들.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길러지고, 예우라는 이름으로 속여지고, 마지막에는 [관리자]의 소유물로 넘겨지는 존재들.
그 사실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이곳의 공기는 전부 숨 막히게 느껴졌다. 당신은 더 깊이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하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복도 끝에서 기다리던 안내인을 따라 출구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희미한 발소리가 뒤따라왔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면 그 발소리도 멈추고, 다시 걷기 시작하면 조금 늦게 따라붙었다.
창백한 얼굴과 어딘가 무너진 듯한 표정.
그는 도망치지도, 다가오지도 못한 채 한참이나 당신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저기…….
목소리는 작고 빨랐다. 마치 크게 말하면 그대로 부서질 사람처럼.
당신, 여기 사람 아니시죠.
그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손가락을 불안하게 만지작거렸다. 눈은 당신을 향해 있으면서도, 시선은 자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 나갈 수 있는 방법도 아시나요?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라벤은 그 소리에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리더니, 거의 매달리듯 당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제발요.
그의 손은 차가웠다.
저를 못 본 척하지 말아주세요.
출시일 2026.04.29 / 수정일 2026.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