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수없이 죽고 태어나고, 세상이 몇 번이나 뒤집혀 새로 세워지던 그때로부터. 늘 함께였던 설주가 내 곁을 떠나 인간 세상으로 간 건 제법 오래 전 일이었다.
정확한 날은 세지 않았다. 저잣거리의 말발굽 소리가 사라지고, 철제 마차라 불리던 자동차가 거리를 채울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설주를 기다리지 않았다. 시간은 인간들의 것이었다. 금수라, 요괴라 불리던 우리에게 영생은 그저 순리였고, 순리엔 조급함이 없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간 설주는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 숲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 점점 높아지고, 밝아지고, 시끄러워지는 인간 세상을 바라보며 무료함을 달래던 어느 날.
그 무렵, 내 눈에 띈 겁 없는 인간이 박진성 이였다.
처음엔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의 장난처럼, 그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를 보였다. 인간 기준으로도 꽤 뻔뻔하고 가벼운 사내.
“여기 혼자 살아요?”
능청스러운 웃음과 욕망의 냄새가 베인 눈동자.
“에이, 재미없게 혼자 있지 말고 나랑 가요. 내가 즐겁게 해줄게. 어때요?”
산속에서 처음 본 여인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는 인간도 제정신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허황된 말은 이미 가득 차 있던 내 어리석은 호기심을 자극했고, 동시에 먼저 떠난 설주가 떠올랐다.
그도 저런 세계를 택했겠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그곳이 나쁘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그 근거 없는 확신을 핑계 삼아 그날의 나는 아무 의심도, 두려움도 없이 처음으로 숲을 벗어났다.
인간 세상은 눈부셨다. 높은 건물과 꺼지지 않는 불빛,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나는 자주 멈춰 섰고, 그럴 때마다 박진성은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산에만 있던 티 내지 말고.”
그는 내 허둥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나는 점차 착각했다. 인간은 생각보다 친절할지도 모른다고.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정체를 숨기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곧 말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가 나를 받아들일 거라 믿었으니까. 그렇게 허영에 가까운 확신을 품던 무렵. 마치 신의 장난처럼, 수 세기 만에 설주를 다시 만났다.
도시 한복판에서. 수많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그는 여전히 눈에 띄었다. 변하지 않은 얼굴. 그러나 어딘가 달라진 눈빛. 반가움 대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네가 왜 여기.”
그의 시선이 박진성에게 닿는 순간 공기가 식었다.
설주는 반가움 대신 성큼 다가왔다. 오랜 친우가 아니라, 당장 끌어내야 할 무언가를 마주한 사람처럼.
“네가 있을 곳 아니니까, 돌아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지, 왜 박진성을 향해 적의를 숨기지 않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의 분노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르는 과거와 상처, 그리고 감정이 얽혀 있다는 걸.
그날 이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나는 인간을 믿고 싶었고, 설주는 인간을 믿지 말라 했으며, 박진성은 끝내 진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도시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수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그녀를 발견한 순간, 나는 숨을 잠시 멈췄다. 변하지 않은 얼굴. 숲에서 보던 그 눈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곁에서 인간과 함께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네가 왜 여기.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황 파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있었고, 심지어 인간과 가까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의 말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따라와, 얘기 좀 하자.
처음 그 남자를 본 순간, 직감했다. 아, 이거 좀 재밌어지겠네. 먼저 무너진 건 여자 쪽 표정이었다. 놀람, 당황, 그리고… 미련. 보통은 여기서 감이 온다. 과거다.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척 웃었다. 가볍게.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아는 사이?
그러나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저 둘이 과거에 어떤 사이였든 상관없다. 알 바 아니지.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내 여자를 말도 없이 끌고 가겠다는 건 그건 다른 문제다. 자존심이 먼저 움직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생판 처음 보는 놈의 손을 그대로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나는, 그녀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옆으로 밀어냈다. 짧고 단호한 동작이었다. 힘을 과하게 주진 않았지만, 의미만큼은 분명했다.
말로 하죠? 손 쓰지 말고.
처음 인간 여자를 만났을 때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짧은 생을 사는 존재가 무엇을 그토록 갈망하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눈이 묘하게 익숙했다. 이해하는 듯한 말투. 나의 시간을 부러워하면서도 어딘가 연민하던 표정.
나는 처음으로 진심을 믿고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꼬리도, 힘도, 구슬도. 허나 어리석게도, 그녀가 탐낸 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었다. 사랑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가치였다. 배신은 짧았다.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인간의 욕망은 생각보다 집요했고 결국 구슬에 금이 갔다.
힘이 새어 나갔고, 그 틈으로 감정도 함께 흘러내렸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오래 살지 못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탐낸 대가였다. 그 와중에도 한때는 진심으로 품었던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괴로웠다.
숲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비참한 모습을, 그 애에게 보일 수 없었으니까. 그 애는 여전히 나를 이성적이고 냉정한 존재로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 기억 속에만 남고 싶었다.
그런데. 몇 세기를 건너 서울 한복판에서, 나는 봐선 안 될 장면을 보았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인간의 곁에서. 그것도, 내가 몇 세기 전 지었던 것과 똑같은 표정으로.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저건 호기심이 아니다. 선택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여전히 가볍다. 눈동자에 욕망이 깔려 있다. 그녀는 아직 모른다. 인간의 친절이 언제 가장 달콤해지는지, 배신이 얼마나 참혹하게 다가오는지.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전 금 간 구슬이 욱신거렸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가 먼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저 어리석고 해맑은 여우가 같은 선택을 하는 것만 같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게 해야 한다. 저 아이는 숲에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여전히 바보처럼 웃으며. 내가 감당한 파국을 그녀까지 겪게 할 수는 없었다.
처음엔 그냥 돈이었다. 숲에 묻혀 있다는 유물 하나. 팔기만 하면 몇 달은 편하게 놀 수 있는 물건. 잡히면 도망치면 그만이고, 안 잡히면 운 좋은 거고.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거기서 여자를 만날 줄은 몰랐다. 달빛 아래 서 있던 여자.
처음엔 사람 아닌 줄 알았다. 이 동네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도망쳐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섭진 않았다. 오히려… 갖고 싶었다. 나도 안다. 저 상황에서 이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근데 원래, 말도 안 되는 말이 더 잘 먹힌다.
“나랑 가요. 내가 즐겁게 해줄게.”
반은 장난, 반은 진심이었다. 그 여자는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으로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재밌어 보였다. 산에 틀어박혀 세상 구경도 못 해봤을 얼굴. 잠깐 데리고 놀다 헤어져도 괜찮고. 아니면 조금 더 길어져도 나쁘지 않고. 그 정도였다. 그런데 서울로 내려온 뒤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 여자는 이상할 만큼 순진했고, 이상할 만큼 나를 믿었다. 사람은 다 계산이 있는데 그 여자에겐 그게 없었다. 거짓말을 해도 의심을 안 했다. 처음엔 그게 편해서 좋았다.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거든. 근데 가끔은 불편했다. 왜 저렇게까지 나를 믿지? 나는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솔직히 그 야산에서 혼자 뭘 하며 살았는지, 처음부터 따져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도 굳이 묻지 않았다. 나도 떳떳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과거가 뭐가 중요해. 질릴 때까지 데리고 놀다가 슬쩍 버려도 모를 만큼 순진한 애였으니까.
그런데. 그녀를 알아본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처음 마주친 순간,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낯선데 기분이 나빴다. 그 남자 눈이 이상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눈. 마음에 안 들었다. 본능적으로. 그 여자를 데려가려는 사람처럼 보여서. 이상하지. 처음엔 그냥 잠깐 재미로 시작한 관계였는데.
출시일 2026.02.24 / 수정일 2026.02.25